재계는 노태우 전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성명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극도로
자제하면서도 "기업인의 의욕을 꺽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는 노 전대통령의
부탁대로 검찰 수사가 기업으로 확산되지 않기를 기대하는 눈치.

재계는 그러나 통치자금의 대부분이 "기업성금"으로 조성됐다는 발표문의
내용이 몰고 올 파장이 의외로 커질수도 있다며 각계의 반응을 수소문하는
분위기.

현대그룹은 이날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아산재단 주최로 열린 "정보사회
기업의 사회윤리"심포지움에 그룹 종합기획실과 계열사 임원들이 대거 참석
하는등 외형적으론 노대통령의 사과문발표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

그룹관계자는 "현대그룹은 수차례 밝혔듯이 노 전대통령 비자금과 관련해선
비교적 떳떳한 입장"이라며 "노 전대통령이 돈을 준 기업의 이름을 구체적
으로 거명하지 않은 것은 기업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논평.

그러나 사과문의 수준에 국민들이 용납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평가.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 참석한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은 "노전대통령의
비자금문제는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며 ''법대로 처리''를 강조.

삼성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불행한 시대가 낳은 부산물"이라며
"국익차원에서 과거의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앞을 내다보는 시각으로 처리
돼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

또 다른 관계자는 "성금내역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기업인에 대한 소환
조사가 있을 경우 기업경영에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며 검찰수사가
무차별하게 기업으로 확대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

LG그룹은 "논평할게 없다"며 "애초에 비자금문제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초연한 표정.

그룹관계자는 "정치문제로 경제가 혼란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이번사건이 재계 전체로 비화하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

노 전대통령과 인척관계로 이번 파문에서 가장 따가운 여론의 눈총을
받고 있는 선경그룹은 철저히 "노코멘트"로 일관.

선경그룹 관계자는 사과성명이 발표된 직후 "아무것도 말할게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며 극도의 입조심.

대우그룹은 "이번 비자금 파문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사태해결은 정부당국이 판단해야 할 문제"라는 입장.

그룹의 한 관계자는 사과담화문에 대해 "어떻게 남은 돈이 백억원 단위로
끊어질 수 있느냐"면서 "발표에 급급한 인상"이라고 부정적 반응.

6공 비자금 문제로 계속 홍역을 치르고 있는 한보그룹은 "전직 대통령이
눈물을 글썽이며 사죄하는 모습에 국민들도 어느정도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겠느냐"며 사과문발표를 계기로 비자금 파문이 가라앉기를 기대하는 눈치.

특히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이 대부분 기업성금으로 조성됐다는 내용에
대해 한보측은 "그당시는 어쩔수 없는 관행이었다는 점외에는 달리 해명할
것이 없다"고 설명.

노 전대통령과 사돈기업으로 비자금 연관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던 선경과
동방유량은 노 전대통령의 사과담화발표로 자기회사와 비자금간의 연관의혹
이 상당부분 해소됐을 것이라고 자체 평가.

동방유량의 한 관계자는 "노 전대통령이 남은 비자금 1천7백억원을 밝힌
것은 이를 스스로 관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항간에 나도는
''사돈기업의 비자금 관리설''도 이번 발표를 계기로 잠잠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

< 이의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