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시장실패"를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질때 그 정당성을 갖는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 시장실패가 아니라 "정부실패" 때문에 정책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부 자신이 잘못 판단해 놓고 이로인한 부작용을 시정하기 위해 또다시
정책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11일 발표한 유류 교통세율 인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보다 기름값이 싸 유류를 과소비하고 교통난과 환경오염을 가속화
시키고 있기 때문에 기름값을 올렸다는게 당국의 배경설명이다.

그러나 속을 들추어 보면 이유는 다른데 있다.

교통세(종전 유류특별소비세)를 재원으로 하는 교통시설 특별회계의 세수가
구멍났기 때문이다.

유류소비는 늘고 있지만 국제유가가 떨어져 세금이 덜 걷힌다는 얘기다.

지금대로 그냥놔두면 2천억원의 세수부족이 생긴다.

결국 정부가 예측을 잘못해 생긴 구멍을 국민이 세금으로 메우도록 한
셈이다.

병원으로 비유하자면 의사가 오진을 해 처방을 잘못 내린 탓에 환자의
병세가 악화됐는데도 환자더러 책임을 지라는 꼴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논의되던 주행세도입등 근본적인 자동차관련 세부담
개선책은 아예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불필요한 자동차 주행을 억제할수 있는 방안인데도 복잡하다는 이유로
"나중에 얘기하자"는게 재경원의 태도다.

당국의 무책임한 행정행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 몫만 챙기는 행태는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교통세는 결함이 생겼지만 국세전체로 치면 올해 세수는 당초에 짰던 예산
보다 1조5천억원 이상이나 초과징수될 전망이다.

경기호조로 세금이 많이 걷힌 결과다.

하지만 주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돈을 이리저리 함부로 옮길수 없다는게
재경원의 설명이다.

오른쪽 주머니는 돈이 넘쳐 터질 지경이라 하더라도 왼쪽주머니는 다른
주머니이니까 따로 채워야 한다는 논리다.

일반회계에서 남는 돈을 특별회계로 넘기려면 추경예산을 편성해야 하는데
이러자면 일이 커지니까 손쉽게 세금을 더걷는 쪽을 택한 것이다.

진단도 제대로 못하고(무능) 자기만 편할대로 하는(불성실) 의사(정부)에게
몸(경제)을 내맡긴 환자(기업과 국민)는 얼마나 불안한지 그 의사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 안상욱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