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대전은 한마디로 말해 "입체전"이다.

비유하자면 D램은 육군이고 마이크로프로세서는 해군,그리고 ASIC(주문형
반도체)는 공군이다.

삼군이 어울려 전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이같은 입체전을 벌일 수 있나.

답은 "노(N0)"다.

육군인 D램만으로 싸우는 나라다.

때문에 한국 반도체 산업은 작전도 단순하다.

양으로 밀어붙일 뿐이다.

굳이 비유를 한다면 "인해전술"이 아닌 "D램해전술"이다.

해전이나 공중전을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갖고 있는 장비라고는 D램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군기(제조.공정
기술)밖에 없다.

한국에는 전함이나 폭격기를 설계할 능력이 없다.

설계는 커녕 밑그림을 그려줄 사람조차 변변히 없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라는 영광된 칭호가 붙은 한국 첨단 산업의 자존심.

하지만 D램을 누구보다 많이 만드는 날랜 손 위에 있는 머리는 비어있다.

좀 폄하하면 이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라고도 할 수 있다.

이같은 상황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설계인력육성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체에 도 문제는 있지만 정부가 첫 단추를 잘못낀 탓이다.

"그 돈많이 드는 반도체 사업은 뭐하려고 합니까. 그럴 돈이 있으면 효자
산업인 신발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지난 85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 한창 "결실"을 맺고 있는
때에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 L씨는 이렇게 "김"을 뺐다.

정부의 인식이 이랬다.

그러니 당장 돈도 안되는 설계인력육성은 말도 꺼낼 형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인프라투자(설계인력육성)에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그래서 숨가쁘게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온 것이다.

D램이라는 푯대만을 향해서.

해외에서 수혈한 고급인력도 거의 대부분 D램 전문가들이었다.

다른 분야의 설계인력을 키운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정부의 이같은 근시안적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올해부터 "반도체 설계인력 육성사업"이라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했지만 그 내용은 빈약하기만 하다.

반도체 관련학과가 있는 30개 대학에 PC 워크스테이션을 사준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반도체 설계교육센터를 선정해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한다는 항목도 들어
있긴 하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두고봐야 할 일이다.

올해 이 사업에 지원될 액수는 40억원이다.

우선 정부가 20억원을 내기로 했다.

당초 1백억원이 책정됐으나 예산심의과정에서 그 20%인 20억원으로 줄어
들었다.

기업들이 내기로 한 20억원은 지난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액 4조원의
0.0005%에 해당한다.

삼성 LG 현대등 반도체3사의 매출액을 합쳐서 따지면 0.0003%에 불과하다.

옛날엔 돈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지금 수준에서 보면 "껌값"도 안된다.

이 돈으로 30만종이 넘는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는 인력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D램등 몇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특수용도로 사용된다.

TV의 화면밝기를 조절하거나 컴퓨터의 기억장치로 사용되는 등 각자의
"주종목"이 있다.

반도체의 성능에 따라 TV등 세트제품의 기능이 결정된다.

반도체를 설계한다는 것은 TV나 컴퓨터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반도체 설계자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갖춰야 한다.

교육의 내용과 질이 풍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도체 설계 인력부족은 반도체뿐아니라 전자산업의 경쟁력을 동반 하락
시키고 있습니다"

반도체 설계 전문회사인 C&S테크놀로지사 서승모사장은 이렇게 지적한다.

반도체와 세트제품은 원래 실과 바늘의 관계다.

예컨대 세트제품의 요구를 반도체가 수용하고, 반도체의 성능이 세트제품의
질을 높인다.

그런데도 이같은 역할을 중간에서 해 줄 설계인력이 없다.

메신저가 없으니 양쪽의 연락은 두절되고 관계는 소원해질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는 양 쪽의 경쟁력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설계인력 부재라는 보틀넥(bottle neck)에 직면해
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공허함도 여기서 나온다.

지금이라도 설계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과감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도체 1위국"을 굳히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조주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