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가 불안해지면 사소한 말 한마디가 시장을 뒤흔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투기꾼들이 이 말을 빌미삼아 시장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기 때문이다.

이번 달러 폭락도 따지고 보면 앨런 그린스펀 미연준리(FRB)의장의 금리
인하 시사 발언에서 비롯됐다.

그린스펀의장은 지난달 23일 의회에서 인플레 압력에도 불구하고 단기금리
를 인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동안 FRB의 금리인상에 대해 불만을 제기해
온 의원들을 겨냥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뉴욕증시에서는 이 발언에 힘입어 다우지수가 이날 사상처음으로
4천포인트를 돌파했다.

증시와는 대조적으로 외환시장에서는 그린스펀의 발언이 악재로 작용했다.

미국이 금리를 내리면 달러 표시 자산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판단하에
투자자들이 달러를 매각하는 바람에 달러가 하락세로 돌아섰다.

주식.채권 가격도 다시 내림세로 반전하고 말았다.

결국 그린스펀의장은 8일 다시 의회에 나가 "달러 폭락에 따른 수입인플레
가 우려된다"며 금리 추가인상 가능성을 시사, 자신의 발언을 보름만에
뒤엎어야 했다.

때마침 분데스방크의 한 이사가 독일의 금리인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바람에
달러 폭락, 마르크 급등 추세는 주춤해졌다.

물론 이전에도 달러 가치를 떨어뜨릴 만한 근본적인 요인들은 잠복해
있었다.

멕시코 금융위기, 균형예산법안 부결, 줄지 않는 무역적자.재정적자 등은
달러가 회복세를 보일때마다 짐으로 작용했다.

투기꾼들은 이런 요인들을 간파하고 있다가 빌미가 잡히는 순간 장세를
반대방향으로 돌려 놓음으로써 차익을 따먹는다.

시장이 크게 출렁댈수록 투기꾼들에게는 유리하다.

저가에 사서 고가에 팔아치움으로써 단기에 대규모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조지 소로스는 92년 파운드화를 집요하게 공략, 영국을 유럽환율
조정장치(ERM)에서 밀어내면서 엄청난 이익을 챙겨 "헤지펀드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투기꾼들은 이번 달러 폭락국면에서도 달러를 팔아치울 빌미를 서너차례
포착했다.

그중 하나가 일본 체신기금이 캐나다 국채에 투자한 자금을 대거 송환한다
는 루머(일본정부는 부인했음)였다.

투기꾼들은 시장이 일본 투자자들의 해외투자자금 본국송환을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이용, 이같은 루머가 나돌자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달러를
팔아치웠다.

지난 3일에는 달러를 부양하기 위해 18개국 중앙은행들이 외환시장 협조
개입에 나서자 투기꾼들은 기꺼이 달러를 팔아치웠다.

이들은 일본 중앙은행만을 상대하는 싸움으로는 싱겁다는듯 FRB와 분데스
방크의 진의를 떠보기 위해 달러 매도를 늘려 달러를 연일 사상최저치로
떨어뜨렸다.

일단 투기꾼들이 시장을 장악하면 상황은 순식간에 "눈사태"처럼 악화된다.

이번 달러 폭락국면에는 근본적으로는 여러가지 달러 약세요인들이 복합적
으로 작용했지만 사태를 악화시킨 장본인은 투기꾼들이었다.

금융시장이 투기판으로 전락하면 손해보는 사람은 실수요자들이다.

수출입대금이나 차입자금을 헤지(위험회피)하기 위해 시장에 참여한
실수요자들은 증거금을 고스란히 투기꾼들에게 빼앗기거나 때로는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

컴퓨터에 의한 거래, 파생금융상품 거래가 확산되면서 국제금융시장은
거대해졌다.

금융시장이 투기판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커졌다.

국제금융시장은 실물경제와 국가간 교역을 뒷받침하는데 존재의의가 있다.

금융시장이 투기판으로 바뀌면 실물경제는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다.

환율이 출렁대면 교역이 위축되고 금리가 폭등하면 투자가 준다.

물론 금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투기꾼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장세가 불안해질 때마다 투기꾼들이 판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해 "금융공황-국제금융체제의 질서 회복"이라는 책을 펴낸 미국의
쥬디 셀턴이라는 사람은 월스트리트저널 9일자 기고에서 "금융시장이
포커판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 김광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