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 직전인 지난달 27일 밤12시.S투금 자금부 김모 대리가 허겁지겁
상업은행 서울 명동지점으로 뛰어왔다.

"휴,타입대를 허용해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김대리는 연신 은행당좌계
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금융기관이 부도를 막기 위해 은행권으로부터 급전을 얻는 타입대.실제
부담하는 이자는 꺽기를 포함해서 연 40%를 웃돈다.

고객에게 신용이 제일인 금융기관에겐 부도직전까지 몰렸음을 자인하는
꼴이니 치욕스런 날이다.

타입대를 썼던 게 물론 이번만은 아니다.

작년 8월에도 몇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워낙 시중 자금사정이 안좋아 당연한 일로 여겼다는게
자금담당자들의 얘기다.

"이번에는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는데도 타입대를 써야 했다.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게 그 이유다"(김득희 동양투금 자금관리부장)는
지적에서 요즘자금시장의 기현상을 엿볼 수 있다.

돈이 돌지 않는 이유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앞으로의
자금시장에 대해 확실한 기상 전망을 할 수 없는 탓이다.

언제 갑자기 자금경색이 심화될 지 모르는 안개상황이라는 게 자금
담당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런 불안감은 자금의 보수적인 운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은행의 가계대출은 요즘 거의 중단상태다.

예금주의 돈을 받아 필요한 사람에게 수혈해주는 은행의 고유기능이
마비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은행은 손쉽게 이익을 낼 수 있는 주식투자등 재테크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다.

한은<>은행<>제2금융기관,기업,가계등으로 이어지는 돈의 유통메커니즘이
동맥경화증에 걸려있다는 얘기다.

은행에서 빠져나온 돈중 상당액이 다시 금융기관으로 흡수되지 않고
블랙홀로 들어가듯이 행방이 묘연해졌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앞두고 불안해진 거액예금자들이
돈을 금고나 장농 속에 넣어두고 있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코앞에 닥친 올 6월의 지자제 선거도 돈의 유통속도를 떨어뜨리는
변수가 되고 있다.

선거후보 예상자들이 은행등 금융기관에서 돈을 찾아 금고 속에 꼭꼭
숨겨놨다는 것.

꼬리표가 없는 현찰로 갖고 있어야 선거후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자금추적을
피할 수 있어서다.

이번 지자제 선거 출마예상자는 당선자의 5배선인 약 2만5천명.

이들이 1인당 5천만원씩을 금고속에 숨겨놨어도 모두 1조2천5백억원이나
된다.

금융계는 이중에서 최소한 절반정도인 5천억원 정도가 실제 출마를
꿈꾸는 이들의 머리맡 금고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신한투금
정상구기업금융부장).

이처럼 돈의 상당액이 물 흐르듯 흐르지 않고 고여있다.

그나마 흐르는 물마저 정부의 이른바 창구지도란 개입으로 왜곡되고
있다.

재정경제원은 최근 콜금리가 치솟자 투금사에 하루짜리 콜금리를
연15%로 운용하도록 지시했다가 말썽을 빚었다.

또 투신사등 금융기관에 양도성예금증서(CD)를 사도록 강요,CD수익률을
떨어뜨리려고 했다가 해당 회사들의 반발을 산 적도 있다.

금융시장의 공정성을 선도해야할 정부가 오히려 인위적인 금리조작으로
돈의 흐름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재테크도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주식투자나 기업어음(CP)매입등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소기업을 상대로 직접 돈놀이를 한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발행한 선하증권등을 담보로 연20%선의 높은 이자를 받고 있다.

돈이 금융기관에서 중소기업으로 직접 흐르지 않고 중간 브로커 단계를
거치니 그만큼 금리부담이 큰 중소기업들만 죽을 맛이다.

<정구학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