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소관사항도 아닌데 굳이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르는 체 하는게
상책입니다. 알아서 득될게 뭡니까. 잘못하다간 화만 당할텐데요.

B씨=아! 그런가. 그럴수도 있겠구먼. 알았어.

A씨는 재무부의 모과장. B씨는 그의 상사다. 외환은행의 한국통신주 입찰
조작사건이 불거져 나오던 지난달 22일아침 출근직후 두사람이 나눈 전화
대화내용이다.

이건 약과다. "외환은행 사건"당시 소관부서의 상하라인도 썩 잘 가동
됐다고 볼수 없다는게 재무관료들의 자체진단이다. 실무국장인 국고국장만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뿐이다. 장관과 국고국장이외에는 오불관언이었다.
그렇다고 장관이 납작 엎드려만 있던 담당자들을 문책할 수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재무부가 책임이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는걸
장관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넘어갈 수밖에. "그런 장관의
처지를 밑에서 환히 꿰뚫고있었으니 굳이 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재무부
P사무관)

"뛰면 다친다"는 보신주의가 공직사회를 좀먹고 있다. 그래서 꼭 해야할
최소한의 일만 하자는게 요즘 관료들의 처세술 제1조처럼 돼가고 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도 마찬가지. 대통령이 지역균형발전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한지가 3개월이 다 돼가는데도 예산실은 꿀먹은 벙어리다. 이 일을
추진하려면 힘있는 실세부처인 내무부에 주는 지방재정을 건드려야 하는데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보복이 올지 모른다고 걱정하는게 실무자들의 정서다.

이렇게 보면 최근 공직자들의 보신주의를 꼭 그들만의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경제기획원의 C국장은 문민정부들어 경제관료들에게 몰아닥친
특징적인 변화를 3다3소로 압축한다. 많아진게 3가지, 적어진게 3가지라는
것. 감사와 투서, 집단민원이 3다다. 3소는 공무원의 소신과 부수입,
그리고 일하려는 의욕. 그 결과 나타난게 소위 복지부동이다.

특히 감사는 두드러지게 많아졌다. 툭하면 감사라고 할 정도다. 자체감사,
상급기관감사, 감사원감사, 여기다 국정감사까지 각종감사가 끊임없이 이어
지고 있다. 웬만한 경제부처는 지난해 이런 각종 감사를 받은 날짜가 평균
1백일을 넘는다. 감사원의 정기감사는 2주일, 국회상임위원회의 국정감사도
2주일로 돼있다. 그러나 청와대 감사원 총리실등의 정책감사 실적감사등
"수시감사"가 그렇게 잦다.

상급부처가 이럴진대 하급관청이야 말해 무엇하랴. 대전시 서구같은 경우는
작년 한햇동안 1백74일이나 감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걸러 한번씩, 1년의
절반을 감사받는데 보낸 꼴이다. 감사받을 준비하는 기간까지 따지면 1년
내내 감사때문에 본업을 접어두었을 게다. 복지부동이 하급관청일수록
더하다는 까닭을 알 만하다.

문제는 횟수가 아니다. 감사의 내용이다. 경제관료들의 불만도 여기서
나온다. 피감기관들에 "무엇 무엇을 왜 저질러서 말썽을 일으켰느냐"는
적발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감사원같은 외부기관의 경우 감사
요원들이 업무내용을 잘 숙지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감사를 한다.
전문가들에게 업무내용을 배워가면서 "비위"를 적발하는 식이다. 업무를 잘
모르니까 "이런 이런 일을 왜 하지 않았느냐"는 지도감사는 생각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경제관료들은 굳이 "일을 만들어서" 할 생각이 없다.
일종의 감사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발위주 감사방식의 폐해는 경제기획원 상공자원부 교통부 건설부 환경처
등 "일을 벌려야 하는" 조장행정부처에서 두드러진다. 재무부처럼 규제행정
이 주업무처럼 돼있는 부처는 감사에 적발될 일이 많지 않다. 조장행정업무
를 하다보면 상황에 따라 법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인데 감사기관들의 칼은 바로 여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감사원이 최근 전례없이 예산실의 예산편성감사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석채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산
편성작업은 소리없는 정부부처간 전쟁과정이다. 재정개혁작업을 벌인
지난해는 특히 그랬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다" 재정개혁작업이
각 부처의 원성을 자아냈고 마침내 감사원 감사를 불러왔다는 설명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러니 일을 벌리기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도 "나 몰라라"하고 덮어두려 할 수밖에. 대통령이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개탄하자 감사원은 다시 "복지부동실태도 감사할 것"이라고 칼을 빼들고
있지만 "글쎄..."라는 반응도 그래서 나온다.

요즘처럼 경제관료들이 피터의 법칙(Peter''s Law)을 되씹는 시절도 없을
것같다. "처음부터 일 많이하고 똑똑하다는 얘기듣는 사람은 적이 많이
생겨 조그만 실수로도 조직에서 쫓겨난다. 반대로 무능해도 눈치만 잘보는
사람은 살아 남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