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예술의전당 공연 '시인의 사랑'…연광철의 완성도 높은 무대
연광철·선우예권의 만남, 슈만 가곡의 깊이와 아름다움 전해
베이스 연광철과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공연 '시인의 사랑'이 열린 장내는 숨을 죽였다.

베이스 가수의 속이 꽉 찬 저음이 콘서트홀에 두루두루 퍼져 나갔다.

연광철이 앙코르곡으로 선사한 '그대는 한 송이 꽃과 같아'는 슈만이 한때 그의 사랑 클라라를 위해 바쳤던 가곡이지만, 이제는 모인 관객 모두의 것이 되었다.

꽃은 아름다움의 비유이지만 지켜야 할 소중함, 사랑스러움에 대한 비유이자 잠깐 있다 사라지는 인생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연광철·선우예권의 만남, 슈만 가곡의 깊이와 아름다움 전해
17일 예술의전당에서 연광철과 선우예권이 선사한 '시인의 사랑'은 베이스 가수가 부른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진귀한 기회였다.

독일 가곡 공연임에도 이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깊이, 진지함, 시심을 향한 조용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의 사랑'은 보통 테너와 바리톤이 많이 연주하고 최근 들어서는 여성 가수들도 심심치 않게 연주하지만, 유독 베이스 성부의 연주는 만나기 어렵다.

음반의 경우에도 전설적인 가수인 한스 호터나 로버트 홀 정도를 제외하면 이 곡을 완성도 있게 불러내는 경우가 드물 정도였다.

우선 독특한 색채와 배음의 예민한 감각을 지닌 슈만의 피아노 파트를 저음역에서 살려내기가 쉽지 않다.

또 피아노와 성악부가 간결하게 응축된 악곡 안에 극히 정밀하게 맞물려 있는 점도 베이스에게는 불리하다.

슈만의 악상은 조밀하고 변화무쌍한 리듬에 기민하게 반응할 것을 요구하지만, 많은 베이스 가수에게 이는 간단치 않은 요구다.

가지고 있는 울림통이 커서 소리를 가득 채워 발성하다 보면 리듬이 둔탁해지기 쉽다.

이에 따라 베이스가 '시인의 사랑'에 도전한다는 것은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연광철·선우예권의 만남, 슈만 가곡의 깊이와 아름다움 전해
반면 연광철은 열여섯 곡으로 된 '시인의 사랑' 전곡을 완성도 있게 노래했다.

특히 하이네의 시가 전하는 예민한 서정성과 신랄한 반어, 짧지만 번뜩이는 연극적 낭송과 긴 호흡의 선율성 등을 오가며 전곡을 다채롭게 빚어냈다.

이 가운데 베이스 가수의 무게감이 빛을 발한 대목은 역시 6곡 '라인강 그 거룩한 물결에'와 7곡 '나는 원망하지 않으리', 13곡 '나는 꿈속에서 울었습니다' 등이었다.

이 곡들은 둔중하게 하강하는 반복 음형, 묵직하게 쌓아 올린 화음의 연속, 피아노 음형의 분절 효과와 성악부 침묵의 대비 등이 인상적인데 이를 더 낮은 성부에서 들으니 그 효과가 더 탁월하게 다가왔다.

연광철은 4곡 '그대의 눈을 바라보노라면'이나 12곡 '햇빛 반짝이는 여름 아침에'처럼 서정성이 빛나는 곡들에서도 탁월한 가창을 들려주었다.

특히 고음역에서 긴장감을 머금은 채 여리게 발성을 유지하는 기술은 연광철의 전매특허로서 독일 가곡의 시적 정취를 품위 있게 전해주었다.

연광철은 시종일관 시상의 전개와 내용에 걸맞게 셈과 여림을 조절하며 전체 곡이 하나의 시적인 낭송이 될 수 있도록 노래했다.

연광철·선우예권의 만남, 슈만 가곡의 깊이와 아름다움 전해
선우예권의 피아노 또한 여러 순간 빛났다.

특히 그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답게 짧은 순간 번뜩이는 강렬함을 부여할 줄 알았다.

이는 피아노 파트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때로는 시어의 내용을 보충하는 역할까지 부여한 슈만의 가곡에 부합하는 능력이었다.

특히 9곡의 '결혼식 장면'이나 10곡의 마음 밑바닥에서 들끓는 '속울음', 11곡의 신랄한 후주 등 피아니스트의 묘사력이 요구되는 장면들에서 선명하고도 인상적인 심상을 재현해주었다.

다만 다소 아쉬웠던 것은 베이스 음역의 긴 울림과 덜 또렷한 배음을 좀 더 민감하게 고려하여 톤을 조절했으면 하는 점이었다.

상행 아르페지오의 최저음(시작음)이 전반적으로 강하고 그 잔향이 오래가 악상의 선명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작품의 첫 세 곡에서 몰입력이 다소 부족했던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응집력과 표현력이 좋아졌고,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연광철·선우예권의 만남, 슈만 가곡의 깊이와 아름다움 전해
2부의 첫 무대는 선우예권의 '다비드 동맹 무곡'이었다.

대단히 재기발랄하고 변화가 많은 슈만의 초기 작품으로 슈만 음악의 두 성격인 플로레스탄(Florestan)과 오이제비우스(Eusebius)가 지속적으로 교차한다.

곧 갑작스레 분출되는 격정과 여리고 감상적인 애상이 서로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선우예권은 특유의 파워풀한 초절기교와 서정적인 울림을 적절히 안배하며 이 두 성격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특히 중반부 이후, 12곡 '유머를 가지고'의 재기발랄한 악상, 13곡 '거칠고 즐겁게'의 우악스럽게 돌고 도는 악상, 14곡 '부드럽게 노래하듯이'의 극히 예민하고 서정적인 악상 사이의 탁월한 색채의 전환은 듣는 이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매력은 곡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이날 공연의 마지막 무대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는 슈만의 개별 가곡 작품들 '내 고뇌의 아름다운 요람', '나의 장미', '헌정'이 연주되었다.

피아노의 저음 부분이 잘 조절되지 못했고, '나의 장미'의 경우 피아노가 좀 더 전체 악상을 이끄는 주도성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아름다운 선율과 세밀함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특별한 무대를 알아보는 관객의 진지한 감상 태도는 이날 공연을 더욱더 빛나게 해 주었다.

연광철·선우예권의 만남, 슈만 가곡의 깊이와 아름다움 전해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