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지는 가을이면 속절없이 흐르는 계절에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부쩍 높아진 하늘이 절정에 이른 날, 경북 영주로 향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시간이 천천히 머물렀다. 아니, 어쩌면 멈춰 있는 듯했다.
사진=임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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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처럼 보고, 입고, 먹고, 즐긴다

반짝이는 청기와와 가을 하늘, 아름드리 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조선시대 어느 마을에서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하다. 2021년 9월 개장한 선비세상 우리 고유의 유산인 선비문화를 폭넓게 체험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전통문화단지다.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참여형 콘텐츠 덕에 영주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거듭나고 있다. 총 99채에 달하는 아름다운 한옥과 전통 오방색 천이 아름답게 흩날리는 포토존이 절로 카메라를 들게 한다. 한옥촌·한복촌·한글촌·음악촌·한지촌·한식촌 등 인터랙티브 미디어가 적용된 6개 테마별 전시관에서는 풍성한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퇴계 이황의 발자취를 따라 느끼는 풍류, 소수서원

선비세상에서 차로 1분이면 푸른 낙락장송이 가장 먼저 반겨주는 소수서원에 닿는다. 학자수림이라 불리는 이 소나무 군락지에는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참선비가 되라는 깊은 뜻이 담겼다.
사진=임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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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직접 이름 붙일 정도로 아꼈다는 정자 취한대(翠寒臺)를 지나 경자바위, 백운교를 차례로 눈에 담으니 몇 백 년 전 이곳의 원생들이 느꼈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시 한 번 다리를 건너 우거진 나무와 조용히 흐르는 물길을 지나면 소수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350여 년 간 4000여 명의 유생을 배출한 최초의 사액서원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선비 정신의 뿌리를 되짚어본다.

소백산 청정지역의 맛, 영주 한우

사진=임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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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체온과 같은 북위 36.5도에 위치해 예로부터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혀온 영주. 소백산의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를 먹고 자란 영주 한우는 전국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한다.

영주365시장에서 도보로 5분, 한우숯불거리에 들어서자 고기 굽는 냄새가 골목마다 가득하다. 어딜 가도 웬만한 고급 한우집 이상의 맛을 경험할 수 있다는 영주 토박이 지인의 귀띔에 주린 배를 잡고 식당 문을 연다. 가격까지 합리적이니 맛있는 고기가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건 인지상정.

물 위에 뜬 신비의 섬, 다리 건너 과거로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영주천이 만나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끼고 마을의 삼 면을 태극 모양으로 돌아나간다. 잘 빚은 도자기 같기도, 꽃봉오리 같기도 한 그 형세가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아 수도리(水島里)의 우리 말인 무섬마을로 불리게 됐다.
사진=임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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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심에는 무려 350여 년간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외나무다리가 있다. 가을볕에 눈 부시게 반짝이는 내성천 위로 길이 150m, 폭 30cm의 아슬아슬한 다리가 수려한 곡선을 이룬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아 중간 중간 보조 다리가 놓일 정도지만, 먼저 가라며 양보하는 이들의 웃음소리와 감사 인사가 넘쳐난다.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처럼, 매년 10월이면 무섬마을의 전통놀이를 재현한 ‘무섬외나무다리축제’가 열려 영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불편함까지 힐링이 되는 고택에서의 하루, 선비촌

어귀에서부터 펼쳐지는 고즈넉한 초가와 기와집에서 그리운 고향 마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살짝 뒷짐을 지니 그 여유로움이 여느 선비 부럽지 않다.

정겨운 노란 장판 위에 폭신한 요를 깔고 잠시 노곤한 하루를 곱씹어본다. 옛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몇몇 고택은 화장실이 방과 분리된 탓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런 불편함조차 색다른 힐링으로 다가오는 공간이다.

소백산이 내린 선물, 영주 사과

사진=임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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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을 맞은 사과나무가 한껏 붉은빛을 뽐내고, 수확에 여념 없는 농부의 허리는 펴질 줄을 모른다. 탐스러운 사과를 구경하고 있자니 농부 하나가 쓱 다가와 흠집 난 꼬마 사과 하나를 건넨다. 상품성이 떨어져 ‘못난이 사과’ ‘보조개 사과’로도 불리지만, 맛만큼은 흠잡을 데 없다.

영주는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와 8~10월의 일교차가 커 사과의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하다. 그야말로 자연이 선사한 선물인 셈이다. 영주시사과홍보관 옆 사과카페에서는 달고 아삭한 영주 사과를 넣은 사과 햄버거도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