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항 거래'로 수사·고발 '작년 24명→올해 56명'으로 급증
수능영어·일타강사·EBS교재 '판박이 지문'에도 '검은 손' 개입
평가원 '검증 부실', 교육부 '뒷북 대응'도 도마 올라

사교육 업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검토 등에 참여한 교원들에게 돈을 주고 모의고사 문항을 산 사실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더 광범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현직 교원이 동료 교원을 끌어들여 문항을 제작하고, 이를 사교육 업체에 팔아넘기는 등 적극적으로 나선 사실까지 확인돼 파장이 더 거세게 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년간 공정한 입시제도라는 평가를 받아온 수능 신뢰도에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숨겨진 사교육 카르텔 규모 더 컸다…교사 주도로 수억 챙기기도
◇ "유명강사가 교사 관리한다더니"…교사가 '문항 거래' 주도
감사원은 지난해 9월부터 3개월간 실시한 '교원 등의 사교육시장 참여 관련 복무 실태 점검' 감사 결과, 교원과 학원 관계자 등 56명을 청탁금지법 위반, 업무방해, 배임수증재 혐의로 경찰에 수사 요청했다고 11일 밝혔다.

앞서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사교육 업체와 연계된 영리 행위를 한 현직 교원의 자진 신고 등을 토대로 자체 조사해 사교육 업체에 모의고사 문제를 판매한 뒤 그 사실을 숨기고 수능·모평 출제에 참여한 4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수능·모평 출제에 참여한 후 사교육 업체에 문제를 판매한 22명(2명 중복)은 청탁금지법, 정부출연연법상 '비밀유지의무 위반' 혐의로 수사 의뢰했다.

그러나 감사원 감사 결과 수사 의뢰 대상이 교육부 발표보다 30명 이상 불어났다.

'사교육 카르텔'이 교육부 예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형성됐다는 의미다.

여기에 현직 교사들이 '문항 거래'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더하고 있다.

지난해 사교육 업체와 현직 교시들의 문항 거래 관행이 알려졌을 당시 교육부는 유명 강사가 수능·모의평가 출제 경험이 있는 현직 교사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면서 이들에게 문항을 사들여 교재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감사원 감사 결과 일부 교사는 문항 제작 조직을 직접 관리·운영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례로 수능·모의평가 검토위원으로 여러 번 참여한 고교 교사 A씨는 출제 합숙 중에 알게 된 교사 8명을 포섭해서 문항 공급 조직을 구성했다.

A씨는 이렇게 포섭한 교사들과 2019년부터 2023년 5월까지 모의고사 문항 2천여개를 만들어 사교육 업체와 유명 학원강사들에게 공급하고 6억6천만원을 받았다.

다른 고교 교사 B씨는 배우자가 설립한 출판업체를 공동 경영하면서, EBS 교재 집필 과정에서 알게 된 교사와 자신의 소속 학교 교사 등 35명을 섭외해 문항 제작진을 구성했다.

B씨는 자신도 직접 문항을 제작하는 한편, 섭외한 교사들에게서 수능 경향을 반영한 문항을 구매한 뒤 사교육업체와 유명 학원강사에게 공급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18억9천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숨겨진 사교육 카르텔 규모 더 컸다…교사 주도로 수억 챙기기도
◇ '출제 경력' 교사에게서 사들인 문항으로 '수능 적중'
1994학년도 도입 이후 공정한 대입 제도로 자리매김해온 수능의 신뢰도에도 흠집이 났다.

2023학년도 수능 영어 문항이 대형 입시학원 유명 강사가 만든 사설 모의고사 지문, EBS 수능 교재 감수본과 동일했던 배경에 '사교육 카르텔'이 자리했다는 점이 확인됐다.

감사원에 따르면 2023년 1월 출간 예정이던 EBS 수능 교재에 고교 교사 C씨가 'Too Much Information'(TMI)이라는 지문으로 2022년 3월 출제한 문항이 수록돼 있었다.

대학교수 D씨는 2022년 8월 해당 EBS 교재 감수에 참여하며 TMI 지문을 알게 됐다.

이어 2023학년도 수능 영어 출제위원으로 활동하며 TMI 지문을 무단으로 사용해 수능 23번 문항으로 출제했다.

D씨는 '교재 집필 중 알게 된 모든 사실을 EBS 허락 없이 유출할 수 없다'는 EBS의 보안 서약서를 위반했지만, 논란이 되기 전까지 아무도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숨겨진 사교육 카르텔 규모 더 컸다…교사 주도로 수억 챙기기도
한편 평소 교사들로부터 문항을 사서 모의고사를 만들던 유명 강사 E씨는 TMI 지문의 원 출제자와 친분이 있는 다른 교사 F씨를 통해 TMI 지문으로 만든 문항을 받아 9월 말 모의고사로 발간했다.

결과적으로 수능·EBS 문항 제작 경력이 있는 교사들과의 거래를 통해 수능 문제를 '적중'시킨 문제집을 만든 셈이다.

다만 C씨와 F씨 사이 문제가 공유된 구체적인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여기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검증 부실'까지 겹쳤다.

평가원은 2021학년도, 2022학년도 수능에서는 중복 검증을 위해 E씨 수능 모의고사를 계속 구매했다가 2023학년도에만 합리적인 이유 없이 E씨 모의고사를 구매하지 않아 사설 모의고사에 나온 문제를 걸러내지 못했다.

아울러 수능 이후 해당 문항과 관련한 이의 신청이 다수 접수됐는데도, 평가원은 해당 문항에 대한 이의 심사를 하지 않았다.

평가원 담당자들은 "지문이 같아도 문제 유형이 다르면 시중 기출문제와 동일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등 기출문항 판정 기준을 유리하게 해석, 해당 문항을 아예 이의 심사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공모했다고 감사원은 봤다.

EBS 교재 감수본과 똑같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전까지 평가원은 판박이 지문 논란에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는 해명만 했다.

숨겨진 사교육 카르텔 규모 더 컸다…교사 주도로 수억 챙기기도
◇ 교육부 '뒷북 대응' 도마 위…사교육 업체는 관망세
교육부는 당혹스러운 모습이다.

지난해 사교육 카르텔 신고 센터를 통해 사교육 업체와 현직 교사의 문항 거래 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했지만, 이전까지 이 같은 관행에 교육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다.

2010년대 후반 수능에 '킬러 문항'이 등장하면서 사교육 업체의 문항 판매도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교육부가 이런 관행을 알고도 사실상 수수방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언제부터 사교육 업체와 현직 교사의 문항 거래가 시작됐는지, 얼마나 뿌리 깊은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모두 미지수다.

감사원 감사 결과 역시 '빙산의 일각'일 수 있는 셈이다.

사교육 카르텔 의혹이 불거지자 교육부는 지난해 말 '교원의 사교육업체 관련 겸직 허가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현직 교사가 입시학원에서 돈을 받고 강의하거나 모의고사 문항을 만들어 파는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논란과 관련해서도 사교육 카르텔 신고 센터에 신고가 이어지자 지난해 7월 뒤늦게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사교육 업체는 몸을 낮춘 채 관망하는 모양새다.

한 사교육업체 관계자는 "필요할 경우 정부 조사에 성실히 응할 것"이라며 "현직 교원들로부터 문항을 사들이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에도 최대한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