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 연쇄파업…팬데믹·인플레로 쌓인 요구 봇물
교섭 결과보다 지렛대…대부분 협상 전 단기 '경고파업'
'노사관계 모범' 독일이 파업으로 몸살 앓는 이유는
대화와 협력 우선의 모범적 노사관계로 이름난 독일에서 최근 하루가 머다하고 파업 소식이 들려온다.

지난해 11월 철도기관사를 시작으로 전국 공항 보안검색 직원과 독일 최대 항공사인 루프트한자 지상직, 버스·지하철·트램 등 대중교통 운전기사들이 속속 '동투'(겨울 투쟁) 대열에 합류했다.

철도기관사노조(GDL)는 올해 들어서만 두 차례 더 파업했다.

그중 한 차례는 닷새로 역대 최장기록을 세웠다.

지난 8일(현지시간)은 치기공사와 간호조무사 등으로 구성된 의료보조원노조(VMF)가 설립 61년 만에 첫 전국 단위 파업을 했다.

현지 언론이 달력에 파업이 벌어진 날을 표시하며 "독일이 파업 열병을 앓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이례적이다.

경영계는 '나홀로 경기침체'에 빠진 터에 파업이 독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다.

'노사관계 모범' 독일이 파업으로 몸살 앓는 이유는
◇ 팬데믹 이후 급증…노조가입 역대 최다
유럽무역연합연구소(ETUI) 통계에 따르면 2000∼2022년 근로자 1천명당 연간 파업일수는 독일이 18일로 프랑스 105일, 벨기에 98일의 5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규모와 강도 모두 꾸준히 약화하던 독일 노동계 파업은 팬데믹에서 벗어나며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과학연구소(WSI) 보고서를 보면 2022년 파업으로 인한 전체 근무손실 일수는 67만4천일로, 금속·전기 부문이 대규모로 파업한 2018년(103만3천일) 이후 가장 많았다.

팬데믹 첫해인 2020년 34만2천일에 비하면 배에 육박한다.

아직 통계로 잡히지 않은 지난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3월에는 철도와 근거리 대중교통, 항공, 해운 부문 노조가 31년 만에 연대파업을 했다.

독일경제연구소(DWI)가 20개 부문 단체교섭을 합의(0)부터 파업·직장폐쇄(7)까지 수치화한 결과 지난해 투쟁강도는 3.0으로 2015년(2.8) 이후 최고치였다.

올해도 이미 상당수 공공 부문 노조가 파업한 데다 건설·화학·금속 등 분야 1천200만명이 적용받는 단체교섭이 예정돼 고강도 투쟁이 계속될 전망이다.

노사 입장 차이가 첨예해지면서 노조에 새로 가입하는 노동자도 늘고 있다.

유럽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산업노조(IG메탈)와 공공서비스노조 베르디(Ver.di) 등이 속한 독일노조총연맹(DGB) 조합원은 지난해 연말 기준 567만명을 기록, 2001년 이후 처음으로 증가했다.

1년 새 늘어난 조합원 수는 2만2천명 정도지만 탈퇴·사망을 제외한 신규 조합원은 43만7천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노사관계 모범' 독일이 파업으로 몸살 앓는 이유는
◇ 실질임금 뒷걸음…"물가상승 보전해달라"
전문가들은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이후 고금리·인플레이션이 노동투쟁 강도를 높였다고 분석한다.

독일경제의 고질병이 된 인력부족도 한몫한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자 물가는 2020년 대비 16.7% 올랐다.

임금 상승률이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실질임금은 오히려 떨어졌다.

노동시장연구소(IAB)의 엔초 베버는 "노조가 최근 몇 년간 실질임금 손실을 만회하려 하는 데다 노동력 부족으로 협상 입지가 강화됐다"고 말했다.

WSI 연구원 토르스텐 슐텐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임금이 2016년 수준"이라며 "올해는 파업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단체교섭 중인 노조 대부분이 10% 넘는 임금 인상에 수 년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임금 손실을 일시금으로 보상해달라고 요구한다.

팬데믹과 엔데믹으로 경기 흐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업계에서 이같은 요구는 더 거세다.

코로나19로 도산 위기까지 몰렸던 항공업계가 대표적이다.

루프트한자는 2020년 지분 20%를 정부에 넘기고 1천명 넘는 정규직 조종사를 감원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3분기 흑자로 돌아섰고 지난해 3분기에는 15억유로(약 2조1천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루프트한자 지상직은 임금 12.5% 인상과 물가상승 보상지원금 3천유로(약 431만원)를 주장하며 지난 7일 하루 파업했다.

임금협상을 대신하는 베르디는 "3년간 직원들 수중의 돈은 10% 줄었다"며 "루프트한자가 기록적 수익을 내면서도 직원에 대한 투자는 너무 적게 한다"고 지적했다.

'노사관계 모범' 독일이 파업으로 몸살 앓는 이유는
◇ "파업권 없는 교섭은 단체 구걸"
"노동쟁의는 우리 기본법(헌법)에 확고하게 규정된 자유 중 하나다.

법률로도 쉽게 제한할 수 없다.

자신의 기회와 권리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
올라프 숄츠 총리가 지난달 철도기관사 파업을 앞두고 내놓은 발언이다.

그는 경영계와 정치권 일각에서 철도파업 대책을 요구하자 이렇게 말하며 파업권을 '적당히' 행사해달라고 노조에 호소했다.

독일 헌법은 파업 등 쟁의행위를 집회·결사의 자유와 맞먹는 권리로 규정하고 경찰력 투입 등으로 제지하지 못하도록 못박았다.

한국처럼 파업 전에 반드시 조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다만 프랑스처럼 연금개혁 반대 등 노동조건 이외 목적을 내건 '정치파업'은 금지된다.

파업을 둘러싼 이런 규정과 인식 차이가 '착시효과'를 낳기도 한다.

사측과 협상 일정을 잡아놓고 동력을 키우기 위해 '경고파업'이라는 명목으로 하는 하루이틀간 단기 파업이 상당수다.

헤센·튀링겐주 DGB 대표 미하엘 루돌프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에 "파업권은 노동자와 노조가 사용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파업권 없는 노사교섭은 집단 구걸"이라고 말했다.

파업이 협상의 결과보다 과정에 가깝다는 얘기다.

노사가 조합원의 경고파업 참여도를 서로 탐색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임금은 노조가 보전해줘야 한다.

이 때문에 노조도 무기한 총파업 같은 극단적 쟁의행위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FAZ는 "오랫동안 대부분의 파업은 경고파업에 그쳤다"며 "무기한 파업은 예외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