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장관 통화·러 차관 방한…관계 관리 의지는 확인, 각론은 견해차
중러와 고위급 소통 물꼬…대중·대러 외교공간 확대로 이어질까
이달 초 중국·러시아와 고위급 소통에 물꼬를 튼 정부가 앞으로 계속해서 대중·대러 외교 공간을 넓혀갈 수 있을지 관심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고위 외교관료가 1∼4일 방한했고, 조태열 신임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중국 카운터파트인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과 첫 통화를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국제질서의 '진영화'가 심화하고 한반도 문제가 미중 경쟁·미러 갈등 구도에 좌우되는 경향이 커지면서 최근 한중, 한러관계 운신 공간은 좁아졌다.

이런 가운데 상당 기간 활력을 찾지 못했던 중국, 러시아와의 고위급 외교 소통이 간만에 잇따라 성사된 것이다.

이를 통해 정부는 한중, 한러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큰 틀의 당위성에는 중국, 러시아 모두와 공감대를 재확인했지만, 각론에는 견해차가 큰 모습이다.

조태열 장관과 왕이 부장의 첫 통화는 조 장관 임명 27일 만에 이뤄지는 등 다소 지연된 감이 있지만 분위기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 부장은 "시종일관 한국을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삼고 있다"며 한중관계를 중시한다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조 장관은 중국이 대만 총통 선거 이후 특히 민감하게 여기고 있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문제와 관련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입장이 변함없다고 확인했다.

다만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중국의 건설적인 역할을 강화"해 달라는 한국과 "각 당사자가 냉정함과 자제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중국의 인식차가 아직 크다.

또 왕 부장이 통화에서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말한 데서 드러나듯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대미 밀착 기조에 경계감을 내비치고 있다.

우호적 첫인사를 넘어 한중 간에 어떤 협력이 가능할지 본격적으로 모색하는 단계로 들어가려면 추가적인 소통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새해 들어 미중은 차기 외교부장설이 있는 류젠차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방미에 이어 양국 안보사령탑 방콕 회동, 금융·펜타닐·경제 워킹그룹 개최 등 고위·실무급 소통에 전방위로 속도를 내며 '리커플링'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중러와 고위급 소통 물꼬…대중·대러 외교공간 확대로 이어질까
반면 한중간에는 지난해 11월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 참석차 왕이 부장이 부산을 방문한 이후 눈에 띄는 고위급 교류가 없었다.

이번 외교장관 통화 성사 이후 후속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해 양측이 상호 편리한 시기에 조 장관이 중국을 방문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한 대목이 주목된다.

그러나 조 장관의 방중이 현실화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릴 전망이다.

일단 다음 달 개최되는 중국의 연례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또 조 장관의 취임 후 첫 방미도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동맹인 미국을 먼저 방문하는 데 아무래도 무게가 실릴 수 있다.

러시아와는 한러가 수개월간 협의해왔던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아시아·태평양 담당 외무부 차관의 방한이 이달 1∼4일 이뤄지며 고위급 대면이 성사됐다.

일단 한국이 강하게 우려하는 러시아의 대북 군사협력 등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이번 방한을 통해 접점을 찾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군사협력을 부인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루덴코 차관은 방한 중 자국 기자들에게 "미국이 중러에 대한 '이중 억제정책' 일환으로 세력을 강화할 구실로 한반도의 현 상황을 이용하는 면이 있다"며 대미 지정학 대결구도 속에서 북한 문제를 다루는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루덴코 차관은 방한 중 한국과의 관계를 관리해 나가려는 의사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루덴코 차관 방한 직후인 6일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며 "양국관계를 최소한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다"고 거듭 강조했다.

서로가 제기하는 문제를 당장 해결은 하기 어렵더라도, 추가 악화를 막으며 현 수준에서 관계를 안정화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자는 취지로 읽힌다.

중러와 고위급 소통 물꼬…대중·대러 외교공간 확대로 이어질까
러시아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한러관계 '레드라인'으로 간주해 왔다.

북러 군사협력 진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다면 한국이 그동안 고수해온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불가 입장에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보고 이번에 루덴코 차관이 직접 방한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러시아가 이렇듯 한러관계 관리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한국도 외교적 공간으로 활용하며 북러 추가 밀착에 대응해 나갈 수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견해가 다름에도 러시아가 한러관계는 계속 관리하며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며 "관계를 관리하려면 서로가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메시지는 우리도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