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만들며, 시대를 진정시킨다. 그녀에게 성형의 흔적이 없다는 것, 자기의 나이대로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은 요즘과 같은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연예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자기 얼굴 대로 살아 간다는 건 자신감의 발로이다.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고 주체적이라는 얘기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김현주에게는 이지적인 분위기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따라붙는다. 특히 비교적 착 가라앉은 보이스 톤이 특징이다. 사투리가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점도 그 비결 중의 하나인데 김현주는 그 옛날 경기도 시골, 고양 출신이다.
강수연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화제가 그쪽으로 점화되긴 했으나 영화 ‘정이’의 주인공은 김현주였다. ‘정이’의 앞 부분을 보고 있으면 미국의 명장 감독 덕 라이먼의 2014년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 생각이 난다. 거기서 톰 크루즈는 계속 죽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지난 번 죽을 때 범했던 오류를 하나하나 극복해 가면 미래의 인류 전사로 거듭난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늘 너무 말도 안되면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게 영화이다. 김현주도 ‘정이’에서 거듭 죽는다. 그녀는 AI이다. 뇌만 살아 있고 거듭된 실험을 통해 불굴의 전투 병기가 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의 핵심 테마는 기억이다. 인간의 기억.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기억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점인데 영화 ‘정이’에서 정이, 곧 김현주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성애의 기억을 버리지 못한다. 그 점이 좋았던 영화이다.
‘정이’에서 김현주가 맡은 배역의 설정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의 톰 크루즈이지만 캐릭터 설정은 같은 영화의 에밀리 브론테이다. 그러나 살짝 연상 작용의 기억력을 조금만 더 튕기면 김현주는 제임스 캐머룬이 만든 1986년 영화 ‘에이리언2’에서의 시고니 위버처럼 보인다. 거기서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리플리 박사는 무시무시한 어미 에이리언을 마주하면서도 더 이상 떨지 않는다. 그녀는 한 손에는 무거운 화염방사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여자 아이를 품에 바짝 땡겨 안고 있다. 리플리는 이제 무서워할 틈이 없다. 아이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계 괴물을 향해 말한다. “내 아이에게서 떨어져 이X아.” 이 영화의 명대사이다. 근데, 근데! ‘정이’의 김현주에게서 바로 그 리플리가 떠올려진다.
영화 ‘정이’는 ‘엣지 오브 투머로우’나 심지어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소스코드’를 베끼느라 작품 면에서는 다소 덜 떨어진 감이 있지만 오로지 김현주의 ‘강한 맘(엄마는 강하다)’ 캐릭터 컨셉으로 다른 걸 다 살린 작품이다. 한 명의 여배우는, 세상을 살리기까지는 못해도 영화 한편은 살린다. 김현주가 요즘 그렇다.
김현주는 가슴 저 한 구석으로 개XX 소리를 읊조리면서도 입술로는 차분하게 "네, 알겠습니다"를 얘기할 줄 아는 여자이고 그녀가 그렇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다시 김현주도 알고 있는 식의, 감정이 교차와 중첩이 가능한 여배우이다. 이런 여배우를 우리는 흔히 성격파 연기자라고 부른다.
과거에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그걸 숨기고 살아 왔으며 그래서 마지막 회에 가까울수록 이 여자가 우리 편인지, 알고 보니 저쪽 편인지, 혹은 엄청난 검은 손의 주인공인지 끝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김현주는 이 16작 드라마에서 역시나 차분하고 이지적이지만 분노하고 무서워하며 욕망하는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을 쏟아 붓는다. 예상컨대 김현주 본인 스스로도 ‘왓쳐’를 가장 최애하는 작품으로 뽑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근데 시즌1에서 김현주는 죽지 않았던가. 아 모르겠다. 헷갈린다. 시즌2 보기 전에 시즌1을 다시 봐야 하는 걸까. 그럴 것까지는 없다. 김현주는 김현주이다. 김현주가 시즌2에서도 우리를 지옥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