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현주에게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다. 하나는 묵묵함 이고 또 하나는 연상호이며 세 번째는 드라마이다. 올해로 물경 47살이어서 나이를 듣고 깜짝 놀라게 되는 김현주는 묵묵하게 연상호의 작품에 나오고 있고(‘지옥 시즌 1,2’ ‘선산’, ‘정이’) 거기서 묵묵하게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도 늘 묵묵하게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국물이 끝내준다"던 김현주, 끝내주는 연기로 영화를 구한다
김현주의 최근작으로 ‘정이’의 경우 영화로 분류되긴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는 점에서 TV영화처럼 느껴진다. 극장용이 아닌 작품은 사람들에게 드라마로 기억되기 십상인 바 김현주는, 굳이 까탈스럽게 나누자면, 영화 쪽보다 TV 쪽 스타이다. 김현주는 솔직하게 얘기해서 ‘절세’라는 단어가 앞에 수식어로 붙을 정도의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그런 점들을 충분하게 커버할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대중들을 안심시킨다. 연기를 못하는, 이른바 ‘발연기’의 여배우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하며, 시대를 화나게 한다. 여배우는 예쁘게 성형하는 일에만 바빠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연기를 잘 하기 위한 연습에 애써야 한다. 그건 만고의 진리이다. 그런 점에서 김현주는 늘 자기 자리를 차분하고 확실하게 지키는 여배우이다.

김현주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만들며, 시대를 진정시킨다. 그녀에게 성형의 흔적이 없다는 것, 자기의 나이대로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은 요즘과 같은 한국 사회에서, 한국의 연예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자기 얼굴 대로 살아 간다는 건 자신감의 발로이다.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고 주체적이라는 얘기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김현주에게는 이지적인 분위기가 트레이드 마크처럼 따라붙는다. 특히 비교적 착 가라앉은 보이스 톤이 특징이다. 사투리가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점도 그 비결 중의 하나인데 김현주는 그 옛날 경기도 시골, 고양 출신이다.

강수연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화제가 그쪽으로 점화되긴 했으나 영화 ‘정이’의 주인공은 김현주였다. ‘정이’의 앞 부분을 보고 있으면 미국의 명장 감독 덕 라이먼의 2014년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 생각이 난다. 거기서 톰 크루즈는 계속 죽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지난 번 죽을 때 범했던 오류를 하나하나 극복해 가면 미래의 인류 전사로 거듭난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늘 너무 말도 안되면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게 영화이다. 김현주도 ‘정이’에서 거듭 죽는다. 그녀는 AI이다. 뇌만 살아 있고 거듭된 실험을 통해 불굴의 전투 병기가 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의 핵심 테마는 기억이다. 인간의 기억.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기억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점인데 영화 ‘정이’에서 정이, 곧 김현주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성애의 기억을 버리지 못한다. 그 점이 좋았던 영화이다.

‘정이’에서 김현주가 맡은 배역의 설정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의 톰 크루즈이지만 캐릭터 설정은 같은 영화의 에밀리 브론테이다. 그러나 살짝 연상 작용의 기억력을 조금만 더 튕기면 김현주는 제임스 캐머룬이 만든 1986년 영화 ‘에이리언2’에서의 시고니 위버처럼 보인다. 거기서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리플리 박사는 무시무시한 어미 에이리언을 마주하면서도 더 이상 떨지 않는다. 그녀는 한 손에는 무거운 화염방사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여자 아이를 품에 바짝 땡겨 안고 있다. 리플리는 이제 무서워할 틈이 없다. 아이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계 괴물을 향해 말한다. “내 아이에게서 떨어져 이X아.” 이 영화의 명대사이다. 근데, 근데! ‘정이’의 김현주에게서 바로 그 리플리가 떠올려진다.

영화 ‘정이’는 ‘엣지 오브 투머로우’나 심지어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소스코드’를 베끼느라 작품 면에서는 다소 덜 떨어진 감이 있지만 오로지 김현주의 ‘강한 맘(엄마는 강하다)’ 캐릭터 컨셉으로 다른 걸 다 살린 작품이다. 한 명의 여배우는, 세상을 살리기까지는 못해도 영화 한편은 살린다. 김현주가 요즘 그렇다.
"국물이 끝내준다"던 김현주, 끝내주는 연기로 영화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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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연상호가 요즘 연일 김현주를 쓴다. 최신작 ‘선산’은 넷플릭스 1위에 올라 있다. 연상호-김현주 콤비 플레이가 대중들에게 확실한 검증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선산’에서 김연주의 이름은 윤서하이다. 그녀는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다. 논문 지도교수의 저서를 대필해 주면서까지 전임교수 자리를 얻기를 바라지만 어째 그게 요원해 보인다. 한국의 대학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한 측면이다. 연하의 남편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이 확실시 되는데 그걸 깔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선산의 문제가 터진다. 알지도 못했던 삼촌이 살해되고 그가 남긴 선산을 둘러싸고 충청북도 진천군의 한 마을은 일대 혼란에 뻐진다. 짐작하겠지만 이 선산은 개발 호재의 중심에 서있고 마을 사람 모두의 욕망이 투영된 곳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모이는 곳은 지옥이 된다. 드라마에서 그 아비규환의 혼란은 고스란히 윤서하, 김현주의 표정에 실린다.

김현주는 가슴 저 한 구석으로 개XX 소리를 읊조리면서도 입술로는 차분하게 "네, 알겠습니다"를 얘기할 줄 아는 여자이고 그녀가 그렇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다시 김현주도 알고 있는 식의, 감정이 교차와 중첩이 가능한 여배우이다. 이런 여배우를 우리는 흔히 성격파 연기자라고 부른다.
"국물이 끝내준다"던 김현주, 끝내주는 연기로 영화를 구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김현주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스터피스 급은 OCN 드라마였던 ‘왓쳐’였다. 2019년 작품이었음에도 매우 오래된 작품처럼 느껴지는 건 코로나 이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급격하게 나뉘어 인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왓쳐’는 희대의 역작이었고 16부작이었던 바, 사건의 개요가 너무나 얽히고 설켜 서사 구조가 방대하기 이를 데 없었던 드라마이다. 연출자 안길호는 SBS 출신으로 아니나 다를까 ‘비밀의 숲’과 ‘더 글로리’를 연출했다. 이런 인물은 괜히 영화 쪽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다.
"국물이 끝내준다"던 김현주, 끝내주는 연기로 영화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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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쳐’에서 김현주는 경찰 내 비리 수사팀의 법률 자문을 맡는 전직 검사로 나오는데 알고 보니
과거에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그걸 숨기고 살아 왔으며 그래서 마지막 회에 가까울수록 이 여자가 우리 편인지, 알고 보니 저쪽 편인지, 혹은 엄청난 검은 손의 주인공인지 끝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김현주는 이 16작 드라마에서 역시나 차분하고 이지적이지만 분노하고 무서워하며 욕망하는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을 쏟아 붓는다. 예상컨대 김현주 본인 스스로도 ‘왓쳐’를 가장 최애하는 작품으로 뽑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국물이 끝내준다"던 김현주, 끝내주는 연기로 영화를 구한다
‘지옥2’가 빨리 공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전작인 ‘지옥’은 저승사자 괴물이 사람들을 빨아 먹으며 흔적을 없애 버리는 웹툰 베이스의 황당한 스토리였다. 그럼에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업보’라는 한국적 민속 신앙의 정서와 결합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유아인 덕이기도 했고 연상호 감독의 인기 덕이기도 했으며 김현주의 일관되고 안정적인 연기가 뒷받침된 덕이기도 했다.

근데 시즌1에서 김현주는 죽지 않았던가. 아 모르겠다. 헷갈린다. 시즌2 보기 전에 시즌1을 다시 봐야 하는 걸까. 그럴 것까지는 없다. 김현주는 김현주이다. 김현주가 시즌2에서도 우리를 지옥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된다.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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