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유행하던 농담이 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3단계 방법’이 그것이다. 첫째, 냉장고 문을 연다. 둘째, 코끼리를 냉장고 안에 넣는다. 셋째, 냉장고 문을 닫는다. 이 얘길 처음 듣는 사람은 웃게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만사와의 격차에서 오는 황당함 때문일 것이다.

‘소망과 시간과의 문제’는 인생의 숙제이자 수수께끼다. 도전과 변화를 스스로에게 기대 못하는 처지, 삶이 공회전에 걸려버린 채 계속 그러기만 하다가 소멸될 것 같은 우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젊음’이란 육체 이전에 ‘실존적 상태’라서, 늙은이 같은 젊은이가 있는 반면 젊은이 같은 늙은이도 있기 마련이다. 젊음의 정신을 잃은 젊은이는 사악한 늙은이 못지않게 추하다. 시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는 경우가 적잖은 것처럼.

좌절과 방황의 시기가 있었다. 끝없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고 어디로 도망친들 내가 내 안에 갇혀 있어 캄캄했다. 그럴수록 더 숨어 살았고, 실지로 내가 어디서 죽어버린 건 아닌지 궁금해하는 친구들까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이제 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한 교수님의 강연회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목 아래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특수제작된 전동 휠체어에 앉아 센서를 입에 물고 여러 기계장치들을 혀로 터치해 조종했다. 그는 시련과 그 극복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저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저를 두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라고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한 시간가량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존경할 만했지만, 내게는 그게 그뿐이었다.

정작 나를 뒤흔든 건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주책맞아 보이는 아저씨가 손을 들고 일어나 ‘악의 없이’ 질문했다. “강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근데 저 PPT는 교수님께서 만드신 건가요?” “네. 제가 직접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셨나요?” “세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아, 네. 답변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교수님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이렇게 부연했다. “만약 제가 이런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삼십 분 안에 PPT를 완성했을 겁니다. 하지만 삼 일이 걸리거나 삼십 분 걸리거나 ‘해냈다는 사실 자체’는 결과적으로 똑같죠. 게다가 사람들은 무언가를 얼른 해낸 뒤 나머지 시간을 허송하거나, 그 해놨다는 일이 엉터리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애초에 아무 일도 하지 않거든요. 인생은 한 것과 안 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언제 해냈다는 사실보다는 결국 해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순간 나는 깨달음에 숨죽였고, 강연장을 빠져나와 낮이 밤이 되도록 걷고 또 걸었고, 실패해 낙담했던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추락해 쓰러져 있을 때, 그래도 뭔가를 차근차근 해나가면 의외로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회복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던 대로만 살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싶어 하거나 안 하는 까닭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한 조각 한 조각 이루어나가면 그 느림이 ‘상대적 스피드’로 승화돼 비참한 현실을 구원하는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냉장고 안에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는 한낱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위로의 법문(法門)이자 삶의 기적을 부르는 주문(呪文)이다. 이 화두에 입각해 ‘행동하는’ 이가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성장시킬 수 있다. 다만 조심할 것은, 코끼리를 냉장고 안으로 넣고 냉장고 문을 닫았는데, 갑자기 춥고 사방이 캄캄해질 때다. 어? 내가 냉장고 안에 들어와 있네? 내가 코끼리가 되어 냉장고 속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면 코끼리와 냉장고에 관한 이야기는 자기기만을 경고하는 냉철한 선문답(禪問答)이 된다. 비록 세상은 자물쇠 모양을 하고 있지만, 고요한 돌파를 포기해선 안 된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나는, 시체처럼 살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