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간 사람들…신간 '호박 눈의 산토끼'
빛바랜 공예품에 담긴 한 가문의 몰락 이야기
어떤 물건은 세월을 품고 있다.

삶의 파고를 겪은 이들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지듯,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풍파를 겪은 물건들은 시간의 흔적을 띠기 마련이다.

빛바랜 네쓰케(根付)도 그렇다.

네쓰케란 일본 에도시대 전통 공예품으로 사람이나 동식물 등을 정교하게 조각한 장신구다.

영국 도예가 에드먼드 드 발의 외삼촌 이그나체가 수집한 진열장에는 호박눈의 산토끼, 으르렁대는 호랑이, 검을 들고 투구를 쓴 소년, 흑갈색 모과나무, 상아색 사슴 등 264점의 네쓰케가 있다.

일본에서 제작된 네쓰케가 빈 출신 전직 은행가의 손에 들어가기까지는 여러 곡절이 있었을 터.
드 발은 신간 '호박 눈의 산토끼'(아르테카)에서 그 비밀을 파헤친다.

그는 네쓰케를 소유한 에프루시 가문의 기이한 파멸을 곡절 많은 유럽 현대사에서 끄집어낸다.

가문의 흥망에 따라 이곳저곳을 부유하는 '네쓰케 이야기'는 마치 떠다니는 구름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을 자극한다.

삶의 무상함과 애상 말이다.

빛바랜 공예품에 담긴 한 가문의 몰락 이야기
이야기는 로마노프 시대 러시아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출발한다.

유대인 요아힘 에프루시는 밀을 매점매석해 큰 부를 일군다.

1860년대 그는 세계 최대의 곡물상으로 성장한다.

당대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가 유대인의 왕이었다면 요아힘은 "밀의 왕"이었다.

요아힘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랬듯, 파리와 빈으로 흩어져 에프루시 은행을 설립해 운영한다.

요아힘의 손자인 샤를은 가문의 장자가 아니어서 사업을 계승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금융계 대신 언론계에 종사하며 인상주의 미술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사들인다.

르누아르, 드가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당대 일본풍에 열광했다.

그중에 네쓰케도 있었다.

샤를은 네쓰케를 얻은 후 소중히 간직하다 빈에 사는 사촌 빅토어의 결혼선물로 보낸다.

역사학자를 꿈꾸던 빅토어는 도망친 형을 대신해 빈의 에프루시 은행을 운영하며 살아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직격탄을 맞는다.

빛바랜 공예품에 담긴 한 가문의 몰락 이야기
책은 가장 화려했고, 또한 어두웠던 격동의 세월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에프루시 가문은 명문가로 우뚝 섰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한다.

피난을 차일피일 미루다 나치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마는 빅토어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그의 부인 에미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일생 완벽한 자유를 누리며 지내던 곳이 또 다른 덫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그들은 시대를 읽는 눈이 부족했다.

빛바랜 공예품에 담긴 한 가문의 몰락 이야기
저자는 찬란함이 가득했던 벨 에포크(Belle Epoque·호시절) 시대의 파리, 파시즘의 광란이 난무한 빈, 폭격으로 건물 60%가 파괴된 폐허에서 조금씩 회복해나가는 도쿄의 모습을 조명하며 운명이 이끈 한 가문의 비상과 몰락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초반에 다소 지루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몰아치는 서사의 힘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코스타문학상, 영국왕립협회 온다츠상 수상작.
이승주 옮김. 484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