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등 각계 12인에 회담 제의…남, '위장평화공세' 평가
南대표, 신군부 헌정유린을 '홍역·감기'에 비유
[남북대화 사료] 북, 12·12 핵심인사에도 "만나자" 편지…직통전화도 재개통(종합)
10·26 이후 한국 사회에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혼란스러웠던 '서울의 봄' 시기에 북한은 조건 없는 대화를 제의하는 편지를 국무총리와 각 정당·사회 인사에게 발송하는 등 유화적인 태도로 남한에 접근해왔다.

28일 통일부가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 제9권과 제10권에 따르면 북한은 1980년 1월 1일 이종옥 정무원 총리 명의로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에게 남북 대화를 제의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북한은 이 서한에서 "고위당국자회담도 성숙시켜나갈 용의"가 있다며 "귀하와 직접 만나 격의 없는 의견을 서로 나누자"고 제의하면서,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장소는 판문점, 평양, 서울뿐 아니라 "제3국도 무방하다"며 대화 재개에 적극적이었다.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인 김일 부주석 명의로 같은 요지의 서한이 정치권 등 각계 인사 11명에게 함께 발송돼 판문점을 통해 우리 당국에 전달됐다.

서한의 수신인에는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연합 공동의장, 김수환 추기경 등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12·12 군사반란의 핵심으로 꼽히는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포함됐다.

[남북대화 사료] 북, 12·12 핵심인사에도 "만나자" 편지…직통전화도 재개통(종합)
북은 이 서한에서 신 총리를 향해 '대한민국 국무총리 신현확'이라고 불렀다.

올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등이 대남 비방 차원에서 처음으로 겹화살괄호를 붙여 '《대한민국》'으로 호칭했으며 그전까지 남측을 대한민국으로 부른 것은 극히 드물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속 조처로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 때 남일 북한 외무상이 구두로 '대한민국'을 언급한 바는 있지만 대남 서면에 우리 국호를 쓴 것은 이 서한이 처음이다.

1979년 1월 당시 주요 국내 언론도 "(북한이) 서한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했다"며 주목했다.

김웅희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은 "북한이 대남 대화 공세를 펴면서'대한민국' 호칭을 사용, 남측을 향해 매우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같은 달 북한은 남북 직통전화 재개통을 시도한 데 이어 다음 달 남북 총리 간 대화를 위한 제1차 실무대표 접촉에서 재개통에 합의했다.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이후 일방적으로 남북 직통전화 소통을 끊은 후 남측의 재개통 촉구를 3년 6개월 넘게 무시하다가 12·12를 전후해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한이 직통전화 불통 기간에도 매일 24시간 북한의 전화 호출을 기다리며 기록한 사실이 드러났다.

1980년 1월 직통전화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는 북측의 비난에 남북조절위원회 서울 측 대변인은 성명을 내어 "직통전화 불통 기간에 매일 아침 규정된 시험통화 시각에 북측을 호출했으며 또 매일 24시간 북측의 호출신호를 기다리면서 이에 관한 감청기록을 녹음테이프로 유지하고 있는 바"라며 반박했다.

앞서 북한은 1979년 4월 제네바 북한 대표부까지 찾아간 우리 탁구 대표팀에 입북 비자를 내주지 않아 평양에서 열린 제35회 세계탁구권선수권대회 출전을 막았고,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대통령이 공동성명(1979.7)으로 제의한 남북미 고위 당국대표 회의를 "극히 비현실적이고 사리에 맞지 않다"며 외교부 대변인 성명으로 거절한 바 있다.

그로부터 반년이 되지 않아 태세 전환에 나선 것이다.

김 전 본부장은 "북한이 12·12 전후 '서울의 봄' 시기 혼란을 틈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과 세력을 조성하려는 위장평화공세를 펼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같은 평가가 사료집에도 실려 있다.

[남북대화 사료] 북, 12·12 핵심인사에도 "만나자" 편지…직통전화도 재개통(종합)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은 국제적으로 양극체제가 완화하는 가운데 한반도에 대화·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 주한미군 철수 논의 등 대미 협상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대화 공세에 나설 때라고 당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의 수단으로 남북대화를 활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17 내란으로 남한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북한의 태도는 다시 강경해졌다.

1980년 5월 22일 판문각에서 열린 제8차 총리 간 대화를 위한 제8차 실무대표 접촉에서 북한은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과 5·18에 대해 "매우 불미스러운 사태들", "군사 쿠데타"라고 직격하며, "한 민족이, 한 혈육이 총칼에 짓밟히는 것"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다만 북한은 신군부의 헌정 유린과 민간인 학살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북한의 위협'을 비상계엄 조치의 이유와 명분으로 삼은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북한 대표들은 "남조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우리는 상관 안하겠"다면서, 최규하 대통령의 5월 18일 특별담화 중 "대남적화 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남침의 결정적 시기 조성을 획책하고 있다"는 언급에 격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북한 대표단은 "우리를 걸고드는(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을 인정하라"고 회의 내내 집요하게 따졌다.

또, 신현확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서리 체재가 된 데 대해 "총리하고 개별 접촉을 하자고 했"지, "서리하고 하자고는 안 했다"고 자격을 문제 삼아 회의를 공전시켰다.

이에 대해 남측은 사실관계를 부인하지 못한 채 "내정에 대한 간섭", "내부사정 시비"라고 반발하면서 회의 진행을 주장했으나 분위기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언론인 출신의 남측 대표는 신군부의 비상계엄조치와 5·18 등 일련의 혼란에 대해 "우리사회는 이따금 가다가 어려운 문제가 나온다"며 '홍역'과 '감기'에 비유하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기도 했다.

[남북대화 사료] 북, 12·12 핵심인사에도 "만나자" 편지…직통전화도 재개통(종합)
동력을 상실한 총리 간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은 제10차를 끝으로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직통전화도 그해 9월 25일을 마지막으로 다시 끊겼다.

이듬해인 1981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에서 최고당국자 상호방문을 제의했다.

김일성을 '주석'으로 호칭하며 서울로 초청했다.

또, 6월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개회식에서 상호방문이 어렵다면 판문점 또는 제3국에서 최고당국자 회담을 하자고 거듭 제안했다.

최고당국자 상호방문 및 회담 제의는 국내외에서 쏟아지는 정통성 결여 비판 속에서 전두환 정권이 남북관계로 국면을 전환하고 남북관계 성과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 대남 성명을 통해 전 대통령이 "살인의 괴수이며 민족의 백정"이라고 실명 비난하고, "우리와 상종할 상대로 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전 대통령의 초청 제의 후 신군부와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지적하는 북한의 실명 비난은 더욱 험악해졌다.

북한은 '불법비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정권강도'(노동신문), '민족의 백정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처단되어야 할 대상이다'(노동신문), '대결만을 추구하는 추악한 반공광신자'(평양방송) 등 제하의 관영매체 기사를 통해 입에 담기 힘든 수준의 극렬한 비난 표현으로 전두환 정권을 맹폭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