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만명의 비정규직 근로자 2년마다 계속 해고된다
이주노동자들, 욕설·성폭행·임금체불에 눈물 흘려

[※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진행한 [삶] 인터뷰 중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동하는 인터뷰이들이 전한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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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우리 사회에는 살면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비정규직, 고아,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욕설을 듣고, 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1천만명이나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만원 안팎의 월급, 즉 2천만원 정도의 연봉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직장을 옮겨야 한다.

거의 2년 주기로 해고당하는 셈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대신해 위험한 현장에 들어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런 참사가 발생하면 사업주와 정규직은 반성과 추모를 하고, 정부 당국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바뀌는 게 거의 없다.

비정규직들이 받는 차별은 모욕적인 경우도 있다.

김용균재단의 김미숙 이사장은 아들 용균이 근무했던 태안 서부발전의 경우, 정규직이 다니는 길은 환했는데, 비정규직이 다니는 길은 가로등이 희미했고, 정규직 식당은 따로 있었으며, 식사 내용물도 달랐다고 했다.

캐비닛 크기에서도 차이가 있었다고 했다.

김용균은 2018년 12월에 태안의 서부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로 밤에 홀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숨졌다.

그때 24세였다.

김미숙은 그의 어머니다.

비정규직의 이런 고통은 담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수십억 원 또는 100억원 이상의 연봉을 챙기는 대기업 사장, 1억원 이상의 연봉과 고용세습 등 각종 특혜를 독점하는 정규직이 '윈윈'을 위해 비정규직이라는 계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정규직 노조는 사장의 지나친 급여를 눈감아 주는 대신에 자신들의 임금도 한껏 올리고 여러 가지 특혜도 보장받는다.

이렇게 해서 늘어나는 비용은 낮은 임금의 비정규직에 전가한다.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은 130만명 정도 되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고향에 있는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픈 부모의 병원비를 마련하고, 귀국해서는 상점 운영 등을 통해 좀 더 잘 살기 위해 한국에 왔다.

이들은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데, 쉬는 날은 한 달에 이틀인 경우가 많다.

바쁜 시기에는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한다.

급여는 농장 노동자의 경우 한 달에 180만원 안팎이고, 제조업 공장에서는 좀 더 많은 돈을 받는다.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인 사업주들이 욕하고, 때리고, 성폭행해도 대체로 참고 넘어간다.

사업주 허가 없이는 직장을 옮길 수 없고, 고용 연장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그런 장치를 만들어놨다.

이주노동자의 숙소는 불법 가건물인 움막, 화장실은 숙소 밖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업주들은 이것도 기숙사라면서 월 15만∼20만원을 받는다.

이런 불법행위를 정부 당국과 지자체들은 잘 알고 있지만 단속할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묵인한다.

특히 지자체들은 마음만 먹으면 단속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업주들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지들인 데다 투표권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북한 동포들의 삶은 더 참혹하다.

먹을 것이 생기면 계속 자식들에게 주고는 결국 굶어 죽었다는 엄마도 있다.

된장 물 한 사발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그게 없어서 굶어 죽는 아버지를 지켜봐야 했던 청소년도 있다.

북한 동포들은 이렇게 굶어 죽을 수는 없다면서 중국으로 넘어오지만 인신매매단에 걸려 농촌 총각에 넘겨지고, 성매매업소에 팔려 가기도 하고, 장기 적출의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중국 쪽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 향토 사학자는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이 이렇게 대규모로 치욕적인 상황에 빠진 적은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굶어 죽은 북한 주민은 300만명이나 된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 때 사망한 남북한 사람들도 300만명 정도다.

한반도에서 600만명이 김일성 가문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김일성 가문에게 책임을 묻거나 반성, 사죄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반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 북한의 핵심 권력층인 김일성 가문을 옹호하고 감싸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자기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우리 사회 곳곳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부문이 적지 않다.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이들을 돕는 행동가들이 있고, 뒤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시민들이 있다.

이들은 권력과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기꺼이 사회적 약자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세상을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 노력한다.

그들은 권력다툼에만 몰두하면서 말장난만 하는 사람들, 자기 밥그릇을 챙기느라 약자를 무시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래 내용은 이들이 [삶] 인터뷰에서 전한 현장의 슬프고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 "우리 부부는 영안실 복도에서 뒹굴고 울었습니다"
(김용균재단 김미숙 이사장)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2018년 12월 새벽에 비정규직 아들 김용균이 다쳤다는 태안경찰서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태안으로 달려갔나.

▲ 경찰은 전화상으로 용균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들이 크게 다쳤거나 의식을 잃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구미에 살았던 우리는 정신없이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충남의 태안의료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뛰어갔다.

그곳에 용균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안실에 가서 인상착의를 말했더니 청년 한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이 서랍장을 열었고, 석탄 분진으로 얼굴이 까만 청년의 얼굴이 나왔다.

머리카락과 피부를 만져봤는데, 용균이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한 탓에 아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태안경찰서로 가서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부모가 자식도 몰라보느냐면서 경찰이 언성을 높였다.

우리 부부는 다시 태안의료원으로 갔다.

서랍장 속 청년의 눈썹을 보고 피부,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더 이상 아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때는 아들의 머리가 몸과 분리된 사실을 몰랐나.

▲ 나는 용균의 손이나 몸을 만지려 했는데, 영안실 직원이 제지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목과 머리가 분리됐고, 부모가 그 모습을 보면 살아가기 힘드니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들은 우리 부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는데, 영안실 밖으로 쫓겨나면서 현실임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복도에서 뒹굴면서 통곡했다.

아들을 다시 보고 싶으니 보여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문을 잠가놓고 열어주지 않았다.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어느 정도 심한가.

▲ 용균이 다녔던 회사의 경우, 정규직이 다니는 길은 환했는데, 비정규직이 다니는 길은 가로등이 희미했다.

정규직 식당은 따로 있었고, 식사 내용물도 달랐다.

심지어 캐비닛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하청회사들에 페널티를 부과하는데, 정규직이 죽으면 4점, 비정규직이 죽으면 2점이었다.

정규직 1명의 목숨값은 비정규직의 두배라는 의미다.

산재 사고가 없으면 나라에서 세금혜택을 주는데, 서부발전은 5년간 20억원을 받았다.

위험한 일을 하청회사에 떠넘겨 노동자가 많이 죽어도, 원청에는 아무도 안 죽은 것처럼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받은 20억원은 원청의 정규직 직원들이 성과금으로 나눠 가졌다.

-- 그동안 국회와 정부 등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청했는데, 개선된 것이 있었나.

▲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등 힘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면서 국민들 이익보다는 자기들 이익을 챙기고 있다.

4년간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런 걸 많이 느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없다.

◇ "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우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미안합니다"
(탈북 청소년 학교인 여명학교 조명숙 교장)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중국에서 탈북민 지원활동을 할 때 '꽃제비'를 만난 일이 있나.

▲ 중국 쪽 두만강 변에서 활동할 당시에 16세가량의 북한 남자아이가 울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달려가 보니 팔다리가 삐쩍 말랐고, 송아지 같은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얼굴은 못 먹어서 부었고 푸석푸석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옥수수를 싣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온 열차가 있었다.

그 안에 몰래 들어간 그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를 주워 먹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그 열차가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이미 굶어 죽었고, 동생 두 명이 북한에 있었다.

그 아이는 굶고 있는 동생들을 살리러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한참을 울었다.

-- 그 아이를 어떻게 했나.

▲ 일단 음식을 먹인 뒤 호주머니에 약간의 돈과 사탕, 엿 등을 넣었다.

이런 것들은 아이가 먹을 게 아니다.

북한으로 가는 과정에서 빼앗길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빼앗길 것이 있으면 잡혔을 때 덜 맞는다.

실제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우리는 달러 지폐를 작게 접어서 비닐에 싼 뒤 그 아이의 항문에 넣어줬다.

그러고는 실로 연결해 잡아당겨 뺄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이 돈을 빼앗기지 말고 북한에 들어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숨죽여 지켜봤다.

다행히 그 아이는 총을 맞지 않고 무사히 건너갔다.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된장 물 한 사발이 없어 죽었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 여명학교 학생 중 한 명이 전한 자신의 이야기다.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는 먹을 것이 생기면 먹지 않고 자식에게 줬다고 한다.

자식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오랫동안 굶은 아버지는 결국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물에 탄 된장 한 사발이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지만, 아들은 어디에서도 그걸 구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음식물이 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면 굶어 죽은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양양 상태가 안 좋다 보니 전염병에 쉽게 걸린 것이다.

그 어머니는 달걀 하나만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 아이는 어디에서도 달걀 하나를 구할 수 없었다.

-- 여명학교에서 힘들 때는 언제인가.

▲ 갑자기 아이가 울면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북한 또는 중국에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는 바들바들 떨면서 울지만 나는 껴안아 주는 것 외에는 해줄 것이 없다.

이럴 때는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미안하다.

◇ "북한민주화운동 하다 북한 출신 활동가 수십명이 총살됐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북한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방해받은 적은 있나.

▲ 좌파 정부 시절에 정부나 정부 외곽 기관으로부터의 지원이 대부분 끊겼다.

내가 하는 강연도 80% 이상 줄었다.

--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이 많은가.

▲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총살당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다.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분들은 생사를 알 수 없다.

--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어떤 곳인가.

▲ 그렇게 극단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곳에서 10년간 살다가 나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6개월, 1년 정도 생활을 하다 보면 적응이 되고 요령도 생긴다.

개구리도 잡아먹는데, 어디에 가면 개구리가 많은지 알게 된다.

체질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찍 죽게 된다.

-- 수용소에서 개구리를 잡아먹어야 하나.

▲ 개구리는 양호한 편이다.

쥐도 잡아먹는다.

제공되는 밥이 너무 적고 옥수수 외의 다른 부식은 없기 때문이다.

-- 좌파 진영이 북한 주민 인권에 관심이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 북한 정권과의 협상을 위한 전술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강경 주사파와 척지기 싫어서 그러는 측면이 더 큰 것 같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우파에 대한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한반도에 혼란만 심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내 생각은 다르다.

혼란으로 인한 희생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역사 발전은 있을 수 없다.

혼란을 고려해서 잔혹한 독재정권을 못 본 척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 "근로복지공단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포천의 한 수목원에서 일하다 의식을 잃는 사고를 당했다고 하던데.
▲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수목원에서 전기톱으로 나무 자르는 일을 했다.

현장에는 사장과 이사가 있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안전모를 주지도 않고 일을 시켰다.

이 노동자는 높이 10m 정도 되는 나무를 전기톱으로 자르던 중에 부러진 나무토막에 머리를 맞았다.

곧바로 정신을 잃는 코마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사장은 119를 부르지 않았고, 30분이 지나도록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았다.

결국 근처에서 일하던 동료가 병원으로 옮겼다.

진찰 결과 얼굴 뼈 4개가 골절됐고, 뇌출혈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노동자는 병원에서 치료받고 간신히 깨어났다.

-- 산재 신청을 했나.

▲ 이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센터에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는 산재 신청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가 산재 신청을 한 것이 확인됐다.

산재 신청 원본을 떼어봤더니 신청자는 회사 측이었다.

그 신청은 노동자가 해야 하는데, 회사 측이 당사자 모르게 신청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출된 서류에 적힌 사고 경위는 더욱 황당했다.

대형 사고임이 틀림없는데 나무를 자르다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고 적혀 있었다.

이는 문서 위조에 해당한다.

-- 근로복지공단은 확인도 안 하고 허위 산재 신청을 접수했나.

▲ 공단은 피해자에게 경위를 묻고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단에 사고 경위가 잘못됐으니 내용을 바꿔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았다.

자원봉사자와 함께 여러 차례 방문했으나 공단은 "사업주와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늘어놨다.

그러더니 최근에서야 내용을 수정해줬다.

-- 사업주가 산재 신청을 하는 것은 불법인가.

▲ 법률 위반이다.

산재 신청은 손해를 입은 노동자 당사자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목원 측이 허위 서류를 만들어 황당한 짓을 했다.

◇ "동네 재래식 화장실을 모두 뒤졌습니다"
(서기원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실종아동 가족들의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 대부분의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닌다.

재래식 화장실, 맨홀 안을 뒤지기도 하고, 광주리장사를 가장해 집집이 방문해 혹시 자기 자식이 있는지 살피기도 한다.

상당수 가정의 가계는 파탄 나고, 80% 정도는 이혼한다.

실종된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에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겨울에 난방도 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

부모는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실종 아이 부모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삶을 견뎌야 한다.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커서 알코올에 빠져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우리 아이가 혹시 잘못됐더라도 여기보다 좋은 세상에 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신앙적 관점은 내가 하루하루 삶을 버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본인은 외동딸 희영이가 10세 때 사라진 이후 아이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도 뒤졌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등 각종 시설 3천 곳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없다는 답장은 2∼3곳에서만 왔다.

거의 모든 시설이 답장조차 안 한다.

-- 보육시설은 협조를 잘 안 해주는 편인가.

▲ 보육시설에 직접 방문해서 입소자 파일을 보자고 하면 안 보여준다.

그래도 다시 한번 요청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없다고 하면 없는 줄 알면 되지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느냐"고 화를 냈다.

파일을 열람해 봐도 아이 사진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부 보육원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에 간 아이, 학원에 간 아이, 밖에서 노는 아이 등이 많다 보니 그렇게 아이들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보육시설에 가서 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보육시설은 왜 성의가 없나.

▲ 아이들이 돈벌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육원 아이 한 명에 연간 1억원 정도의 예산이 들어간다.

실종자 부모가 보육원에서 아이를 찾아내면 보육원 입장에서는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를 내줄리 없다.

◇ "극단적 선택하는 고아들이 많습니다"
(고아권익연대 조윤환 대표)
[삶-특집] "아 제발, 아이가 총 맞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 건너기를"
-- 본인이 고아 출신인데, 고아들의 삶은 어느 정도 힘든가.

▲ 보육원에 아기들이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아기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처음에는 큰 소리로 울다 금방 그친다.

울어도 보육사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조금 성장한 아이들도 처음에 보육원에 오면 눈물을 보이지만 곧바로 중단하게 된다.

울면 두들겨 맞기 때문이다.

-- 보육원 출신들이 극단적 선택을 많이 하는가.

▲ 고아 출신의 극단적 선택의 비율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다.

작년 8월에 광주의 한 대학교 기숙사에서 18세의 고아 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입학 이후 그는 고아라는 사실을 숨기고 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은 부모로부터 한 달에 50만∼100만원의 용돈을 받았는데, 이 학생이 보육원으로부터 받은 용돈은 월 15만원 정도였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좀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끝내는 자신의 후원 계좌에서 원장 몰래 돈을 빼내 사용했다.

이를 알게 된 원장은 그를 심하게 꾸짖었다.

앞으로 등록금을 포함해 돈 한 푼도 지원해줄 수 없다고 했다.

-- 그 학생은 그 말을 듣고 극단적 선택을 했나.

▲ 그는 더 이상 보육원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해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는 후원 계좌에 남아있는 돈 90만원을 모두 빼내 사용했다.

그 돈은 그 학생 명의의 후원금이었으니 훔쳤다고 볼 수 없다.

자기 돈을 쓴 것이었다.

그 학생은 마지막 소비를 하고는 옥상에 올라가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가 남긴 쪽지에는 "읽을 책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때 기숙사 친구들은 여름방학이어서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방학에도 그는 갈 곳이 없었다.

◇ "죽은 아기의 관은 사과 상자 정도로 작아요"
(공영장례 지원하는 나눔과나눔의 박진옥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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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장례는 어른 장례와 다른가.

▲ 전통 장례 방식에 따라 진행되는 장례 절차는 동일하다.

다만, 제물 상에 술 대신에 바나나우유, 초콜릿 우유가 올라간다.

관은 사과 상자 정도로 작다.

아기들은 수의를 입지 않는다.

예쁘게 수놓은 배냇저고리를 입고 하늘나라로 간다.

배냇저고리는 부산에 사시는 한 자원봉사자가 한땀 한땀 만들어 보내주신다.

코로나가 극심한 때에는 물류대란으로 배냇저고리를 제때 공급받지 못하기도 했다.

장례 바로 전날 부산의 자원봉사자가 급하게 KTX를 통해 서울로 올려보내고, 우리는 이를 찾으러 서울역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 서울시립 어린이병원에서 숨진 아이들도 많이 오나.

▲ 부모 없는 아기가 어린이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결국 숨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번은 태어난 지 1년 6개월 된 아기가 무뇌 수두증으로 숨졌다.

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척수액이 차 있는 선천적인 병이다.

아기는 공영장례를 통해 추모의 공원에 봉안됐다.

합동위령제를 위해 추모의 집을 개방하는 날이 1년에 한 번 있는데, 아무도 올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병원 간호사들이 와서 애도하고 아기 사진도 놓고 갔다.

아기는 병원에 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의 이쁨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간호사들이 아기를 위해 예쁜 옷도 사입히고, 머리띠도 선물하면서 따뜻하게 보살폈다.

돌잔치도 했다.

가족이 전혀 없는 아기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