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박근형 등 몸을 사리지 않는 열연…내년 2월까지 국립극장
한바탕 웃음 속에 숨은 쓸쓸함…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못 하겠어. 이제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
실체가 없는 인물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두 방랑자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 제자리에서 운동을 시작한다.

기력이 넘치는 듯 팔다리를 힘껏 휘두르는 디디와 달리, 고고는 팔을 몇 차례 뻗어보더니 이내 기력이 쇠한 듯 몸을 축 늘어트린다.

디디의 몸짓을 보며 웃던 관객들도 밤낮으로 이어진 기다림에 질려버린 고고의 싫증에 웃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지난 19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한바탕 웃음 사이에 허무함을 숨긴 작품이다.

고고와 디디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만담 같은 대사에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지다가도,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삶의 허무함을 털어놓자 객석은 어느새 숙연해졌다.

한바탕 웃음 속에 숨은 쓸쓸함…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953년 파리에서 초연했다.

국내에서는 1969년 임영웅 연출이 초연한 뒤 극단 산울림에서만 50년간 1천500회가량 무대에 올랐다.

주인공 고고와 디디가 맥락을 알 수 없는 단편적 대사를 주고받는 것이 특징이다.

두 사람은 앞에서 한 말을 잊어버리고 똑같은 말을 되묻는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끝없는 기다림과 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희비극으로 불린다.

오경택 연출은 대사와 대사 사이 간격을 짧게 유지해 희극적 요소를 돋보이게 했다.

코미디 장면에서 빠른 속도로 대사를 주고받자 객석에서 연달아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러다가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좌절이 반복되며 쓸쓸함을 줬다.

고고 역의 신구, 디디 역의 박근형, 짐꾼 럭키와 그의 주인 포조를 연기한 박정자와 김학철 등 연기경력만 도합 220여년에 달하는 배우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미디 연기를 선보였다.

바닥에 넘어진 디디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누운 채로 몸을 펄떡대는 장면이 대표적이었다.

국내 무대에서 여성 배우로는 처음 럭키를 연기한 박정자 역시 웃음을 자아내는 춤사위로 인상을 남겼다.

한바탕 웃음 속에 숨은 쓸쓸함…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에서 돋보인 부분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신구와 박근형의 에너지였다.

특히 87세의 고령인 신구는 두 시간 반에 달하는 공연 시간 내내 몸을 움직이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지친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연기는 이들이 연극 무대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했다.

할 일이 없으니 "서로에게 욕지거리나 퍼부으며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하는 장면에서 이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그러다가도 함께 붙어있기 싫으니 "서로 떨어져 지내자"며 소리를 치는 장면에서는 오래전 사랑이 식어버린 커플을 보는 듯했다.

두 사람의 다채로운 감정 연기는 고도의 존재를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을 열어줬다.

삶에 지친 노인처럼 보일 때면 이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영원한 안식처럼 느껴졌고, 무언가에 묶여버린 인생을 이야기할 때면 고도는 자유를 상징하는 듯했다.

작품은 공연을 관람한 모두가 저마다의 고도를 마음에 품고 극장을 나서도록 만들었다.

희곡을 쓴 베케트 역시 고도의 존재를 둘러싸고 어떠한 해석도 내놓지 않았기에 해석은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고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에서는 관객 모두가 공허한 감정을 공유했다.

숱한 기다림도 모자라 이제는 고도가 오지 않으면 목을 매겠다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년 2월 18일까지 계속된다.

한바탕 웃음 속에 숨은 쓸쓸함…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