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외교관·정치가로서 60여년 간 활약
자서전·평전·외교 분석서 등 수십 종 남겨
책 속에 은전처럼 뿌려진 지혜…'외교 대통령' 키신저
"어떤 자연법칙에 따르기라도 한 듯, 모든 세기마다 권력과 의지, 지적 도덕적 추진력을 갖추고 국제체제 전체를 자신의 가치에 따라 형성하는 국가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
100세를 꼭 채우고 29일(현지시간) 별세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그의 전공 분야인 외교와 국제질서 역학에 관해 남긴 통찰이다.

책 속에 은전처럼 뿌려진 지혜…'외교 대통령' 키신저
키신저 전 장관은 20세기 세계 최강국 미국의 정치학자, 외교관, 국무장관이었다.

1954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학자의 인생을 산 지 69년, 1956년 넬슨 록펠러 고문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지 67년,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1969~1975)과 국무장관(1973~1977) 등으로 국가기관에 봉직한 지 54년이 지났지만, 그의 통찰과 탁견은 여전히 미국 정가와 세계 외교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생전에 '전 세계의 외교 대통령'이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닌 이유다.

수많은 저자들이 그의 삶을 다룬 전기를 냈고, 키신저 자신도 '백악관 시절'(White House Years), '격변의 시절'(Years of Upheaval), '부흥의 시절'(Years of Renewal) 등을 저술했다.

국내에도 다종다양한 책이 출간됐다.

30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국내에서 키신저를 다룬 책들만 약 30종에 이른다.

책 속에 은전처럼 뿌려진 지혜…'외교 대통령' 키신저
그가 여전히 주목받는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 시대를 겪는 중에 중요한 정치적 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키신저는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전 세계를 뒤흔든 '외교술'로 미국을 정점의 경지로 견인했다.

물론 비판 거리도 많다.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저서 '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을 담당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전범'으로 체포하라"고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공과(功過)가 있지만, 모든 이가 인정하는 건 그의 탁월한 외교술이다.

특히 미국의 세력 약화 속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우처럼 전쟁이 잇따르고, 미·중 대치 속에 대만이 새로운 화약고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 그의 숙성한 지혜가 더욱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책 속에 은전처럼 뿌려진 지혜…'외교 대통령' 키신저
20세기 미국의 일극 체제를 옹호했던 키신저는 근자에 '세력균형'을 말하고 있다.

그가 전범으로 삼은 체제는 19세기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가 추구했던 빈 체제다.

빈 체제는 강대국 간 세력균형에 의한 균형상태와 정통성이라는 공통의 가치에 기반했다.

빈 합의가 이뤄진 1814년 이후 약 100년간 유럽에서는 대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키신저는 올해 출간된 '헨리 키신저의 외교'에서 국제질서가 안정적으로 존재하려면 세력균형에 의한 균형상태가 공통의 가치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이 압박을 통해 변화할 것이라거나 약화할 것이라고 보는 건 위험한 발상"이라며 "중국은 세계가 아닌,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길 바라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이 모두 동참할만한 세계질서를 제시하고 균형점을 찾는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책 속에 은전처럼 뿌려진 지혜…'외교 대통령' 키신저
키신저가 남긴 말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가 중국과 러시아에 정통한 외교관이었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정치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수많은 저서에는 외교와 국제질서에 대한 지혜가 은전처럼 뿌려져 있다.

책 속에 담긴 미지수들을 하나하나 찾아 식을 세우고, 방정식을 푸는 건, 이제 후대의 몫이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