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한여름 무더위를 날리는 데 추리소설이 제격이라고 주장하지만, 내 생각에 추리소설을 읽기 가장 좋은 계절은 지금부터다. 어둠이 점점 길어지고 스산한 날씨에 조금씩 움츠러드는 가을날의 저녁. 십수 년 전 처음 가 본 영국의 첫인상도 꼭 그랬다. 잔뜩 흐린 날씨에 비까지 오락가락하는 가을날의 런던은 왜 영국을 추리소설의 본산이라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쓴 소설의 셜록 홈스 탓에 피곤해요, 죽일까 합니다”
내 머릿속에서 ‘영국’과 ‘추리소설’을 연결하는 단어는 오직 하나다. ‘셜록 홈스’. 전 세계에 거대한 팬덤 ‘셜로키언’을 양산한, 전설의 시리즈 말이다. 사냥 모자에 파이프를 물고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홈스가 이 한마디를 던지는 순간, 독자들은 긴장과 흥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보게, 왓슨.” 그리고 모험 시작.

이 책은 ‘셜록 홈스 애호가이자 추리소설 탐독가’인 이다혜 기자가 셜록 홈스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인문 기행서이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작가 코넌 도일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셜록 홈스>가 아니라 <코넌 도일>이다.

셜록 홈스 시리즈의 주 무대인 런던 베이커스트리트에서 시작한 여정은 코넌 도일의 일대기를 따라 영국 곳곳을 누빈다. 코넌 도일의 고향 에든버러에서 병원 개업 후 (찾아오는 환자가 없어)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포츠머스까지, 뻔한 영국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묘미를 맛볼 수 있다.
“제가 쓴 소설의 셜록 홈스 탓에 피곤해요, 죽일까 합니다”
그리고 코넌 도일이 있던 곳에는 어김없이 셜록 홈스의 흔적이 남는다. 심지어 코넌 도일 생가터에 있는 동상마저 도일이 아닌 홈스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던 에드몽 로카르의 법칙은 코넌 도일과 셜록 홈스 사이에도 적용되는가 보다.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명성과 부를 가져다준 홈스를 도일은 얼마나 아꼈을까?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심을 엿볼 수 있다. “저는 그의 명성이 피곤합니다”, “홈스를 죽여서 영영 끝장내버릴까 합니다.” 작품 속 홈스의 죽음과 부활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 도일은 그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지배당하는 인생이 지겨웠던 것이다. 그동안 홈스의 빼어난 추리와 미스터리한 사건이 주는 흥분에만 빠져 있던 나는, 이제야 그 이면에 놓인 작가의 고단함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하지만 홈스를 죽인 후 자신이 겪을 일들을 조금이나마 예상했더라면, 도일도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화려한 단풍철을 지나 추위와 어둠이 깊어질 즈음, 다시 셜록 홈스를 꺼내 읽어야겠다. 이전까지 눈여겨본 적 없던, 홈스와 왓슨의 활약 뒤에 가려진 코넌 도일의 흔적을 찾으면서.
“제가 쓴 소설의 셜록 홈스 탓에 피곤해요, 죽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