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병원, 제2 연평포격전 발생하면 부상 장병 살릴수 있나"
"암의 85% 해결가능…담배 끊고, 많이 걷고, 검진 받아야"
박재갑 前 국립암센터원장 "의대 인재집중 바람직하지 않아"

[※편집자 주=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 인터뷰 기사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지난 14일 송고한 [삶] "선생님, 독극물 담배 팔아 나라 예산에 쓴 시절 있었다면서요?"는 성장 과정과 담배 문제를 주로 다뤘고 오늘(21일) 송고하는 기사는 국방의대 설립 문제, 국민 암 검진, 암 정복, 걷기운동 캠페인 등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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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나는 2017년 11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넘어 귀순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군 병사가 국군 병원이 아닌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군 병원이 총상을 치료하지 못하고 민간에 넘기다니 말이 됩니까?"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75)은 지난 9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군 병원은 연평 포격전 같은 국지전이 발생해 군 장병이 다쳐도 제대로 치료할 능력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립암센터 원장 시절에 국방의대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과대학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되지 않았다고 했다.

194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같은 학교 대장암 교수, 암연구소장, 국립암센터 초대 원장ㆍ2대 원장, 특수법인으로 전환된 국립중앙의료원 원장을 지냈다.

대장암 전문의로서 7천 건의 수술을 진행한 그는 서울대 암연구소 소장 시절에는 국가정책인 '암 정복 10개년 계획'을 제안하고 수립했다.

국립암센터 원장에 취임한 후에는 흡연율을 낮추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담배의 제조와 매매를 금지하는 운동을 펼쳤다.

국립중앙의료원장 시절에는 운동화 신고 출근하고, 생활 속에서 걷기 운동하는 '운출생운' 캠페인을 전개했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본인이 직면했던 슬픈 죽음은 무엇인가.

▲ 어머니가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뇌동맥류 파열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받은 후 회복 중이었다.

신경외과 인턴이 기관지 삽입관 교체 때 너무 굵은 관으로 바꾸려 해서 간호하던 셋째 형(위생병으로 군 복무)은 관이 굵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 인턴이 강행해 어머니가 출혈에 따른 질식으로 돌아가셨다.

의료사고였다.

그 당시 나는 서울대병원 부교수였다.

-- 의사로서 기억에 남는 환자는 누구인가.

▲ 외과 레지던트 시절, 제주도 도립병원에 파견 나간 적이 있다.

당시 배를 부두에 정박시키려다 밧줄에 의해 목뼈와 기도가 손상돼 응급실로 실려 온 어부가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숨이 막혔다.

나는 그 순간 빠르게 기도를 확보해 숨을 쉬게 했고, 그 어부는 살아났다.

-- 큰어머니 수술을 직접 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 내가 서울대 전임강사 시절에 위암으로 큰어머니가 청주에서 수술받으시려 했다.

아버지는 큰어머니께 조카인 나한테 수술받으라고 권하셨다.

내가 수술을 맡아 개복했더니 암은 췌장까지 전이돼 있었다.

위를 절제한 후 췌장은 전기 칼로 지졌다.

나는 큰어머니가 6개월밖에 못 사실 것이라고 사촌 형에게 말했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수십 년을 더 사셨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본인 삶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나.

▲ 성공했다기보다는 운이 좋아서, 하늘의 도움으로, 내 능력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 후회되거나 아쉬운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 국방의대가 아직 설립되지 않았고, 군에는 상급종합병원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국립암센터 원장(2000∼2006년)이 끝나갈 때쯤 당시 윤광웅 국방부 장관한테 전화가 왔다.

그는 국립암센터는 잘 되고 있으니 이제는 군(軍) 의료를 도와달라고 했다.

군대에서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해서 의료사고가 자주 생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검토한 끝에 국방의대와 법인 형태의 국방의료원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중증 질환에 대해 난이도가 높은 의료행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종합병원 가운데 정해진 요건을 갖춘 곳을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당시 검토해보니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받은 의료기관들은 모두 대학병원이면서 법인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 의대학장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 의대 학장들이 반대했던 이유는.
▲ 의대와 의사 수가 더 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과대학장 협의회가 유관 의사단체들과 함께 신문에 반대 광고를 내기도 했다.

-- 우리 국군병원 의료수준이 낮은가.

▲ 2017년 11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던 북한군 병사는 북한군이 쏜 총탄에 맞았다.

그런데 그가 수술받은 곳은 군 병원이 아니었다.

이국종 교수(당시 중증외상센터장)가 있는 아주대의료원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총상 입은 사람을 군 병원이 치료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연평도 포격전 같은 국지전이 발생해서 우리 장병들이 크게 다치면 군 병원이 중환자들을 살릴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군 병원에서 못 살리면 민간병원에서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휴전선 지키는 것을 왜 민간에 용역을 주지 않고 있는가?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군 병원이 민간병원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인가.

▲ 군 병원이 총상 등의 치료에는 민간병원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총을 맞더라도 민간병원이 아닌 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게 정상이다.

군 병원은 총상, 지뢰에 의한 부상, 화학무기나 세균무기에 의한 부상 등에서 민간병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전문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국군병원은 그렇지 않다.

육사, 공사, 해사 출신들이 서울대, 연세대 등에 와서 수련받는데, 대학병원들은 그런 분야에 특화된 병원이 아니다.

-- 외국에는 국방의대가 있나.

▲ 국군이 있는 나라는 대부분 국방의대를 갖고 있다.

군의관을 체계적으로 키우고 군 병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 국립암연구소-해군종양내과부에서 연수받을 때 그 해군 뒤편에는 미국 국방의대 캠퍼스가 있었다.

중국, 일본, 독일 등도 군 병원이 상당히 발달해 있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운동화 신고 출근하고 생활 속에 운동하자는 '운출생운 캠페인'은 어떻게 하게 됐나.

▲ 2010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으로 취임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것은 암뿐 아니라 심혈관, 뇌혈관, 폐렴, 당뇨 등 주요 사망 질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진전시키기 위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하게 됐다.

그때 스포츠의학의 권위자인 삼성의료원 박원하 교수가 나를 보더니 "원장님 감격스럽습니다.

내가 평생 국민들에게 운동화 신기 캠페인을 하고 싶었는데, 원장님은 이미 운동화를 신고 있네요"라고 했다.

내가 당시 운동화를 신은 것은 걷기 운동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서울에 눈이 많이 와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구두 대신에 트레킹화를 신었더니 편하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 이후 계속 신고 다녔던 것이었다.

나는 그날 박 교수한테 앞에 나와서 운동화 신기에 관해 설명해보라고 요청했다.

그는 매일 30분 이상 빠른 속도로 걸으면 모든 운동의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운동화를 신고 걸어 다니자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고, 생활 속에서 걷자는 '운출생운' 캠페인이다.

-- 땀이 날 정도로 걸으라고 하는데, 여름철이 아닐 때는 쉽지 않은 듯한데.
▲ 땀 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약간 숨이 차거나 약간 힘이 들 정도로 걷는 게 좋다.

걷기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천천히 걸어도 숨이 찰 수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적절한 운동이 되는 것이다.

운동선수는 더 빨리 걸어야 숨이 차고, 운동이 된다.

-- 청와대에 갈 때도 운동화를 신었다고 하던데.
▲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다.

휴식 시간 때 나는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서 이 대통령에게 보여줬다.

이 대통령은 "나도 땀이 흠뻑 날 정도로 빨리 걷습니다"라고 했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암 정복은 언제 되나.

▲ 내가 서울대 암연구소장 시절에 '암 정복 10개년 계획'을 세웠지만 정복이라는 말은 교수로서 써서는 안 되는 용어다.

100% 완전 정복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생명현상에서 '십중팔구' 정도면 거의 됐다고 본다.

담배를 안 피우고, 백신 접종을 잘하고, 음식을 잘 먹고, 운동하면 암의 3분의 1이 예방된다.

이를 1차 예방이라고 한다.

또 다른 3분의 1 암은 국가검진 등을 통해 일찍 발견하면 완치할 수 있으며 이를 2차 예방이라고 한다.

나머지 3분의 1 암 가운데 수술하고, 항암제 쓰고, 방사선을 이용하면 이중 절반가량은 치료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암의 85%는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 대장내시경을 1년 전에 했는데도 말기 대장암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왜 그런가.

▲ 대장 내시경은 보통 5년에 한 번 하라고 권한다.

용종(폴립)이 자라서 암으로 바뀌는 데 5∼1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암이 매우 빠르게 자라는 경우도 있다.

용종이나 암이 돌기 모양이 아닌 평평한 형태이면 내시경으로 발견을 못 할 수 있다.

-- 암 선고받을 때 의연한 환자도 있나.

▲ 요즘은 이전과 달라졌다.

과거에는 암에 걸리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5년 생존율이 70% 이상에 달해서 환자들이 이전만큼 많이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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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암연구소장 시절, 연구소 건물을 짓는데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지원을 이끌었다고 하던데.
▲ 내가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암연구소 소장이 됐다.

암연구소장은 서울대 내에서 명예롭고 권위 있는 보직이었다.

나는 암을 연구하기에는 건물이 작고 낡았다고 판단해 대학 본부에 가서 새로운 암연구소 건물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본부는 예산이 없으니 외부 지원을 받으라고 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이건희 삼성 회장으로부터 300억원 지원 답변을 받았다.

이 회장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는 배석한 비서실장에게 대뜸 왜 박 소장이 원래 요구한 액수에서 깎았느냐고 한마디 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건물이 바로 삼성암연구동이다.

이 건물 안에는 이 회장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

-- 한국종교발전포럼 회장을 10여년간 하고 있는데.
▲ 나는 인문학을 잘 모른다.

어릴 때는 교과서 외에 읽을 책도 없었고, 의대에 진학한 이후에는 쫓기는 삶을 살아서 독서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 늘 무식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성균관대 서정돈 총장이 같은 학교 유학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을 뉴스로 접했다.

나도 용기를 내서 같은 학과에 진학했고, 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공부를 해 보니, 조선조의 유학이 나라를 망쳤다는 주장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나는 더 나가서 다른 종교도 알아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유교, 어머니는 기독교, 아내는 천주교로 우리 가정 내 종교가 다양하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

나는 2009년에 각계 인사들로 이뤄진 포럼을 시작하게 됐다.

-- 한글꼴 '재민체'를 만든 계기는.
▲ 나는 정년퇴직 후 방명록이나 부조 봉투에 내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쓰고 싶었다.

서예 공부를 시작했는데, 서울대병원 시계탑 건물에 게시돼 있는 '대한의원 개원 칙서'가 생각나서 이 글씨체를 반복해서 썼다.

이 글씨체가 고귀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를 본 국민대 김민 교수(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가 함께 하자고 해서 재민체를 만들었다.

재민체라는 이름은 박재갑과 김민의 두 번째 글자를 조합해 만들었는데, '주권재민'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큰형(박재길.작고)과 의대 선배인 김노경 종양내과 교수(작고)를 존경한다.

큰형을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존경했는데,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한번은 형이 서울에 오셨는데, 살이 빠져 있기에 검진받아보라고 권했다.

말기 상태의 대장암이 발견됐고, 형은 결국 돌아가셨다.

김노경 교수는 자리를 탐내지 않고, 정도(正道)를 가는 분이었다.

제안받은 암연구소장 자리도 그는 완강하게 사양했다.

자신이 암 치료는 했지만, 실험은 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소장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 잘 먹는다.

친구들은 '박재갑이 맛있다고 하는 것은 믿지 말라. 그놈은 쥐약도 맛있게 먹을 놈이다'라고 할 정도다.

잠도 잘 자는데, 누우면 금방 잠든다.

보통 저녁 9시 좀 넘어서 자고, 오전 6시 전에 일어난다.

나는 많이 걷는다.

저녁 식사 후에 1시간30분 정도 우면산을 다녀오고, 생활 속에서도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서 많이 걸으려고 노력한다.

-- 쉽게 잠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 내가 단순해서 그렇다.

간혹 복잡한 일을 풀어야 할 때는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일이 안 되고, 어떤 사람이 훼방을 놓아서 일이 틀어지면 나중에 화근이 될까 봐 돌아가신 부모님이 막아줬다고 생각한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고 하던데.
▲ 국립암센터 개원식에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했다.

개원식이 끝나고 로비에 전시했던 폐암 표본을 보여주면서 나는 마이크를 잡고 10∼15년 후에 담배를 안 팔겠다는 입법예고를 미리 할 의향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물었다.

그 당시에 그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 대통령이 퇴임하고 동교동에 있는 그분의 사저에 간 일이 있다.

담배 제조 및 매매 금지 입법청원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문제와 외환위기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5년이 후딱 지나가서 담배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

건강 조심하고 반드시 성공하라"고 했다.

-- 정치인들은 담배 제조 및 매매금지법 입법청원에 관심이 없었나.

▲ 입법청원을 위해 국회의원 299명 중에서 250명 이상을 만났다.

현황판을 만들어서 국회의원들을 체크했다.

그들을 만나면 하루평균 기준으로 담배 탓에 죽는 사람이 한국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많이 죽어요?"라면서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관심이 없는 것이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장관,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기 자리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금연을 권한 일이 있었나.

▲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원도, 장관도 아직 안 됐던 시절에 여객기에 동석한 일이 있었다.

나는 광주에 강연하러 가는 길이었고, 그분도 광주에 간다고 했다.

나는 초면이지만 "담배를 끊어라, 건강 망가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더니 그는 "나 좀 잘게요"라면서 잠을 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화가 날 경우에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처음 만난 내가 극성스럽게 금연을 이야기하니 화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끝내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봉하마을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담배를 못 끊었다고 토로했다.

[삶] "총맞은 北귀순병, 軍병원 아닌 민간병원에 보내다니"
-- 본인의 단점은 무엇인가.

▲ 나의 속을 쉽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화가 나 있는지, 기분이 좋은지 금방 안다.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 의대에 우수한 학생들이 집중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리, 화학, 공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인재들이 골고루 가야 한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는 의대가 이렇게 높은 경쟁률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수재들은 화학과, 화공과, 물리학과 등으로 진학했다.

-- 앞으로의 포부나 계획은.
▲ 나는 먼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한 삶의 원칙이나 좌우명도 갖고 있지 않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아침에 눈이 떠지면 늘 행복하다고 생각했으면 한다.

우리 주변에는 행복한 것 천지인데,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아파보면 눈 뜨고 걸어갈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고 축복이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