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는 깊은 연민과 공동체 의식에서 나온다"
"기성 정치인 물러나고 10·20대들 정치 참여해야"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시인 나희덕(57)은 온화해 보인다.

외모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의 시도 그렇다.

'절제와 균형'은 그의 시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그러나 최근의 시를 보면 그가 유순한 서정시인만은 아니다.

2021년 말에 펴낸 시집 '가능주의자'에서도 사회적 불평등이나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두드러진다.

불의나 부당함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는 스타일이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본사에서 나희덕을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문단의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예전보다는 높아졌지만, 아직도 과거 방식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여성 문인들이 그런 일에 접했을 때 좀 더 단호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 남성 작가가 다른 여성 작가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해서 물컵을 던지며 항의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한국 정치에 대해서는 환멸을 느낀다고 하면서 차라리 10대, 20대가 정치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했다.

현재의 양당 구조가 지닌 폐해들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대안세력이 보이지 않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같은 대학 국문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김수영문학상(1998년), 현대문학상(2003년), 대산문학상(2022년)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도 용강이다.

할아버지는 조만식 선생이 총재였던 조선민주당의 당원이었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총살을 당하셨다.

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결혼한 누님의 가족들과 월남했다.

아버지는 함석헌 선생의 책이나 강연을 통해 영향을 받은 종교적 이상주의자였다.

-- 어머니는 부산에서 성장했나.

▲ 어머니는 고향이 전주였으나 집안 사정으로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우수했던 어머니는 학교를 자퇴하고 경상도에 있는 신앙공동체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아버지와 함께 공동체를 떠나 결혼한 후에도 평생 수도자적인 삶을 사셨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본인은 보육원에서 성장했다고 하던데.
▲ 아버지의 친지가 충남 논산에서 운영하는 에덴 보육원에서 어머니가 총무로 일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육원 내 사택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맏딸인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잠은 사택에서 잤지만, 보육원 아이들과 같은 밥을 먹고, 같이 놀고, 같이 학교에 다녔다.

보육원에는 100여 명의 원아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많은 아이를 돌보느라 늘 바빴고, 우리 삼 남매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보면서 서운함보다는 존경심을 가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면목동에 있는 애향원이라는 보육원에 취업했고, 그곳에서 나는 다시 10년을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 생활 형편은 어떠했나.

▲ 어머니의 월급은 일반적인 직장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텃밭을 일구고 염소와 닭을 길렀으나 가정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울로 이사한 뒤 아버지는 필경사로 일했다.

관공서의 서류를 손글씨로 정리해 등사하는 일이었는데, 밤샘 작업이 많았다.

경제 사정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가족들의 사랑은 두터웠다.

대학 시절 나는 대여섯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중고생을 가르치는 과외도 했고, 방학에는 유치원 미술 교사도 했다.

잡지사 교열, 피아노 레슨, 교회 반주도 했다.

오리온제과에서 과자 이름 짓는 아르바이트를 몇 년 동안 하기도 했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보육원 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 보육원 안에서는 부모가 있는 아이라서 소외됐고, 밖에 나가면 보육원 아이로 취급됐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다.

물론 친하게 지낸 아이도 있었고,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걸 고마워한 친구가 등하굣길에 병약한 나의 가방을 들어주려고 했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총무 딸이 보육원 아이를 부린다고 다른 사람이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런 환경이 나를 내성적이고 생각이 많은 아이로 자라게 했던 것 같다.

-- 보육원 이야기가 작품에 별로 없다.

왜 그런가.

▲ 보육원이라는 공간은 외롭고 소외된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문화적으로도 빈곤하다 보니 싸움이나 일탈적 행위도 잦은 편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이 문학적으로는 특이한 소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시절 이야기를 거의 쓰지 못했다.

형제나 다름없는 그들의 삶을 글로 쓰는 게 문학적 대상화가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시를 만난 것은 언제인가.

▲ 중학교 2학년 때 이상준 윤리 선생님이 문학청년이었다.

그분은 시를 읽어주거나 칠판에 적어주곤 하셨는데, 나는 시를 베껴 쓰다가 갑자기 전율이 일었다.

시에 매력을 느끼면서 점점 교과서 밖의 시들을 찾아 나섰다.

방학에는 131번 버스를 타고 지금은 사라진 서울의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에 가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온종일 시집을 읽었다.

그렇게 읽다 보니 어느새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중학교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처음으로 장원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이 군기를 세게 잡는 데다 문청(문학청년) 특유의 치기 어린 분위기가 나와 맞지 않았다.

한 학기도 안 돼 문예반을 나와 생물반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생명체나 물리적 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실험이나 관찰을 좋아했다.

시인이 안 됐다면 생물학자가 됐을 것이다.

-- 청소년기에 길거리 어른들의 친구였다고 하던데.
▲ 청소년기에 무릎 신경염을 앓았다.

등하굣길에 갑자기 다리에 통증이 오면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길거리 공사장에 불 지핀 곳이나 슈퍼 앞 의자에 앉아 쉬면서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에는 다리가 아픈데도 많이 걷고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청소년기에 걸으면서 길 위에서 만난 존재들이 나한테는 문학적 스승이었다.

-- 아버지는 맏딸이 시인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던데.
▲ 아버지는 자신이 종교적 이상주의자로서 어렵게 살다 보니, 딸은 현실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명문대 법대에 진학해 법관이 되라고 하셨고, 공부 이외에 문학책을 읽으면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래서 참고서 밑에 문학책을 숨겨놓고 읽곤 했다.

아버지가 반대하니까 더 반발심이 일어서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분은 아니어서 나와 논쟁도 많이 했다.

내 논리력의 팔 할은 그때 길러진 것 같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대학 국문학과에 진학한 것은 문학에 대한 꿈 때문이었나.

▲ 송곡여중 시절에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니라 서울여상 진학을 원했다.

빨리 은행원이 돼서 독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인 송곡여고에 진학한 것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강권 때문이었다.

대학 전공을 국문학으로 선택한 것도 시인이 아니라 언어학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첫 학기 언어학 스터디그룹에 들어갔는데, 나는 언어학 전공자와 기질과 관심사가 너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내가 문학적 인간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서 활동했다던데.
▲ 어느 날 81학번이었던 우상호 선배(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가 보자고 해서 만났다.

당시 총학생회장 출마를 앞두고 선배는 자신이 못다 이룬 문학의 꿈을 대신 펼쳐보라며 문학회 가입을 권유했다.

이상하게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들도 문학에 대한 자신의 꿈을 나에게 실현해달라고 말하곤 했다.

나의 문학적 가능성을 그분들은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되기에는 재능이 부족하고 기질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물론 대학 시절 시 쓰는 것을 좋아했고 열심히 쓰긴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 내 시가 자주 실리는 편이었다.

독문과 친구가 '연세춘추' 기자였는데, 예정된 기사가 펑크 나거나 지면이 남으면 나한테 급하게 시를 부탁해왔다.

연세문학회에는 2학년 2학기에 들어갔다.

-- 학생운동도 했는가.

▲ 국문과 학회와 비공개 서클에도 가입했다.

그때 나를 의식화한 사람은 지금 오마이뉴스 대표로 있는 오연호 선배다.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한국사회의 변혁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나를 지탱해온 종교적 관점과 충돌했다.

학생운동에 전폭적으로 투신하지 못한 것은 용기가 부족해서이기도 하고, 경계인으로서 살아온 내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학생운동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나는 민중신학, 생명운동, 동학 등을 공부하며 다른 대안이나 투쟁의 방식을 고민했다.

그 여러 갈래의 길이 결국 문학에서 합쳐진 게 아닌가 싶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취미는 무엇인가.

▲ 다른 예술 장르의 전시와 공연을 보는 걸 좋아한다.

예전엔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렸다.

요즘은 바빠서 그림은 전혀 못 그린다.

대신 온라인으로 다른 분야의 강의를 듣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다큐멘터리 이론과 텍스트에 관한 강의를 3년 동안 들었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 인류세(人類世) 등 새로운 담론 등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레이엄 하먼의 '예술과 객체',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도나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종과 종이 만날 때' 등 혼자 읽기 어려운 책들을 함께 읽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이 좋다.

-- 술은 좋아하나.

▲ 신인 시절 문단에서 나의 별명은 '전도부인'이었다.

술도 전혀 못 하고 종교적 분위기와 모범생 기질을 지녔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전형적인 모습을 깨뜨리는 데 술도 도움이 됐다.

부정맥에 좋다고 해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을 마시면 유쾌해지고 좀 더 유연해지는 것 같다.

술을 즐기는 편이지만 취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폭음을 한 적은 거의 없다.

-- 하루 루틴은 어떻게 되나.

▲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퇴근해서 밥해주고 재우고 나면 밤 11시는 되어야 시간이 났다.

그때부터 새벽 2시, 3시까지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됐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커서 학교 강의나 가사노동을 제외하면 주로 책 읽고 글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다.

30년 이상 TV를 거의 보지 않아서 유행하는 드라마나 연예인들 이름도 잘 모른다.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시각 중심의 문명과 미디어의 세례에 덜 길들여지고 시인으로서 청각이나 촉각 등 다른 감각을 예민하게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부채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하던데.
▲ 1989년 스물셋에 등단하고, 스물넷에 결혼하고, 스물다섯에 첫아이를 낳았다.

청춘이라는 걸 누려볼 틈도 없이 정신없이 살았다.

게다가 남편이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고,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빨랐다.

얼굴도 모르는 채권자들이 찾아와 아우성치고, 신용정보회사 사람들이 아이들을 해치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빚의 무게에 눌려 마음이 무너지거나 강퍅해지지 않으려고 채무와 이자가 얼마인지를 한 번도 계산해보지 않았다.

월급 외에도 강연료, 심사비, 문학상 상금까지 털어 넣으며 계속 갚아나갔을 뿐이다.

지난 34년간 나는 채무자였고, 작년에 빚을 모두 갚았다.

-- 채무의 고통 속에서도 시를 계속 썼나.

▲ 오히려 시를 쓰는 일만이 그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고 일상의 남루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나를 들어 올려줬다.

감정을 강하게 토로하지는 않지만, 외마디 비명처럼 절박했던 순간을 한 컷 한 컷 찍듯이 시를 써나갔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나에게 시를 쓰게 했고, 정신적으로 확장되거나 다듬어지는 계기가 됐다.

--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 궁극적 목표든, 임시적 목표든 세운 일이 없다.

목표를 세워봤자 그대로 된 적이 없고 늘 다른 돌발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도 몇 등을 하겠다, 이걸 갖고 싶다, 무엇을 이루겠다 하는 생각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한순간 한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낼 뿐이다.

외부적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내면을 잘 살펴서 삶의 방향이나 태도를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화를 거의 안 내고 잔소리도 안 한다.

부모로서, 교수로서 내 생각을 내세우고 가르치기보다는 자식이나 제자를 삶의 주체로 존중하고 친절한 조력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시간과 마음을 흔쾌히 내어주는 편이다.

단점은 무척 많다.

밖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성격이 급하고 즉흥적인 선택을 할 때가 많다.

권력이나 위계를 잘 인정하지 않고, 가끔 돌직구 발언으로 적을 만들기도 한다.

늘 바쁘게 살아와서 그런지 걸음도 빠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에둘러 가는 방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 그만뒀는데, 그 이유는.
▲ 1990년대 중반, 우리가 추구했던 사회적 이상이 무너지면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가 몰려왔다.

어느 날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문득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데, 내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교사 생활을 계속하면 시를 못 쓸 것 같았다.

입시 체제에 맞춰서 문학을 가르치는 것도 시인으로서는 힘든 노릇이었다.

시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나를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교사직을 그만둔 뒤 시를 쓰는 데 집중했나.

▲ 그러지 못했다.

은행 업무시간에 집에 있으니 온갖 금융회사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렇게 해서 어마어마한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MBC라디오 '여성시대' 구성작가로 일했는데, 1년이 지나고서는 피로감과 무력감이 들어 그만뒀다.

그 무렵 버스를 타고 가는데, 문득 창밖으로 연세대 정문이 보였다.

내면에서 '저기 내 살길이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버스에서 내려 대학원 사무실에 찾아갔다.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간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고, 완전히 바스러질 것 같았다.

나 자신을 다른 토양에 옮겨심어야 살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 따른 선택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만이었다.

-- 시를 쓰는 이유는.
▲ 나에게 시 쓰기는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보태는 방식, 기도하는 방식, 애도하는 방식, 때로는 싸우는 방식이다.

물론 읽는 이에게 아름다움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것도 여전히 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시는 세계의 고통과 어둠을 드러내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역할도 해야 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시를 쓴다.

좋은 시는 깊은 연민과 공동체 의식에서 나온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본인의 시가 교과서에 많이 실린 이유는 뭐라 생각하는가.

▲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교과서에 골고루 실려 있는 편이다.

내 시가 중고생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고, 내용도 무난해서가 아닐까 싶다.

적절한 난이도를 지니고 윤리적으로 무해한 시가 반드시 좋은 시는 아니다.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초기작이고, 최근의 시는 그 교과서적 기준을 벗어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 2023학년도 국어 수능시험에서 본인의 시가 출제됐는데.
▲ '음지의 꽃'이라는 시다.

대학교 2학년 때 썼는데,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군대에 끌려가는 상황을 '벌목의 땅'으로 표현했다.

나무들이 베어지고, 토막 나고, 잎도 꽃도 피울 수 없는 죽음의 시절이었다.

나무토막에 구멍을 뚫어 포자를 심으면 죽은 나무의 자양분을 먹고 피어오르는 버섯이 '음지의 꽃'처럼 보였다.

버섯이 민중의 봉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1980년대의 전형적인 민중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도에서 수능 문제로 출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시대에 따라 상징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 시가 시험문제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시는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는데, 시험에 나오는 순간 하나의 답이 정해진다.

과연 시를 시험에 출제하지 않고 향유할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라의 경우 유년기부터 시를 많이 읽게 하고 외우게 한다.

창의력을 높이고 사유나 상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를 즐겨야지, 시를 낱낱이 해부하고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것은 가장 비(非) 시적인 일이다.

-- '푸른 밤'이라는 시에서 '너'는 누구인가.

▲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로 그 시는 시작한다.

그래서 연애 시로 많이 읽히고, 이 시로 청혼에 성공한 사람도 여럿 봤다.

그런데 이 시에서 '너'는 한 명으로 특정하지 않고 다양한 대상이나 의미로 읽히면 좋겠다.

연인이 아니라 미래의 나 또는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지점일 수도 있고, 존경의 대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너'가 누구냐가 아니라, '너'에게 이르는 여정의 진폭과 속도, 걸어가는 마음에 있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공과 사가 분명한 성격이라고 하던데.
▲ 일상에서는 너그러운 편이지만, 공적인 문제에서는 좀 까칠하고 원칙주의자에 가깝다.

어떤 직책을 맡으면 사적인 친소관계나 정치적 이해관계보다는 직무윤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부당하다고 판단하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논리와 근거를 갖고 조용히 싸우는 스타일이다.

시인치고는 공적 자아가 강하고 행정력이 있다고들 한다.

-- 문단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성폭력을 작가의 낭만적 객기나 일탈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1990년대만 해도 문단은 남성 중심의 문화였고 성폭력도 있었다.

어떤 행사 뒤풀이 자리였다.

한 여성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내 앞에 앉았던 남성 문인이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쟤는 하룻밤 화대가 얼마야?"라고 옆 사람한테 물었다.

자기들끼리의 농담이겠지만 나는 같은 여성 작가로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순간 탁자에 있던 물컵을 던지며 "동료에게 어떻게 화대라는 말을 쓰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른 살 무렵의 일이다.

-- 본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시인으로서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 그때 결혼해서 아이 엄마인데다 시인으로서 출판사나 문단 권력에 기대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문학적 기반을 갖지 않은 여성 작가는 소신 있게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문단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뒤늦게라도 용기를 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예전보다는 문단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가부장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과 행동을 접하곤 한다.

여성 문인들이 그런 일을 접했을 때 좀 더 단호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남성 문인들도 고정된 성 역할이나 가부장적인 인식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한다.

[삶] 시인 나희덕 "여성 문인들, 성희롱에 단호히 대응해야"
-- 한국 정치에 대한 생각은.
▲ 한국 정치의 현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해 환멸이 느껴질 정도다.

정치의 역할은 원래 세상을 개선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비뚤어져 있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정치인들이다.

정치적 언어 또한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되고 천박해지고 있다.

지금의 양당 구도나 대의제의 폐해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 한국 정치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 10대, 20대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세대가 잘못한 게 너무 많다.

586세대는 과거에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기는 했지만 그걸 정치적 명분으로 삼아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왔다.

정책의 전문성도 부족하고 합리적 대안세력을 만들지도 못했다.

이제 기성세대들은 물러나고 젊은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

-- 10대, 20대가 정치를 잘 할 수 있을까.

▲ 오히려 지금의 기성세대들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문제를 몰라서, 경험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정치를 못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욕망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나 진영논리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시라고 말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 정년보다 조금 일찍 퇴직해서 지방에 내려가 살까 생각 중이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와서인지 시골에서 글을 쓰며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협동조합이나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실험이나 실천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궁리를 더 해봐야겠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