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보전' 논란 속에 지역사회 문화 보전 노력의 결실
전문가들 "사람 체취 불어 넣자" "탐라의 종 다시 울리길"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독특한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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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제주의 중심지였던 제주목관아를 복원한 지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과거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고, 한때 지하 주차장 건설로 인해 흔적 없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위기를 딛고 현재까지 이어져 온 제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30일 제주목관아의 과거와 오늘을 짚어본다.

◇ 주차장에 묻혀 사라질 뻔한 제주목관아
1991년 9∼12월 4개월간 관덕정 인근 제주시 옛 도심 일대 문화 유적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대학교수와 학예연구사, 박물관 연구원 등 전문가와 제주대학교 사학과 학생들이 조사 보조원으로 대거 참여했다.

이 지역이 도심 주차난 해소를 위한 지하 주차장 예정지로 결정된 뒤 지역사회에 '보전'과 '개발'이라는 논란 끝에 이뤄진 조사였다.

제주 옛 모습을 기록한 '탐라지'(耽羅誌, 1653),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702) 등 문헌자료를 보면 관덕정 일대는 제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제주목(濟州牧) 관아가 있던 곳으로 문화유적과 유물이 발굴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일제는 과거 목관아를 모두 헐어 그 자리에 조선인을 핍박하기 위한 경찰서, 법원 건물 등을 세웠다.

주차장 건설을 원했던 일부 사람들은 일제에 훼손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과거 목관아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하지만 그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주차장 예정 부지에서 통일신라 시대 제주에 존재했던 탐라국(耽羅國)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에 걸친 토기 파편과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이 출토됐다.

그뿐만 아니라 관아 건물 기단, 주춧돌 등 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가 발견돼 문화·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이 지역을 사적지(史蹟地)로 지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때 주차장 건설을 의결했던 당시 제주시의회 의원들 상당수가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 지역을 보존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2차 추가 유적 발굴조사는 피할 수 없었다.

조사가 이뤄질수록 일제에 의해 파괴된 조선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제는 목조건물을 부수고 1m 이상 지하를 파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지었던 만큼 조선시대 건축물의 크고 작은 초석, 기단석 등이 일제 건물 파편과 함께 섞여 나왔다.

상당수 유적이 일제에 의해 사라졌지만, 땅속에 잠들었던 과거 유물과 흔적은 계속해서 출토·발견됐다.

외대문, 중대문을 비롯해 홍화각, 우연당, 성내 연못, 우물, 담장 등 구한말까지 자리했던 제주목관아 건물 배치가 차례로 확인됐다.

결국 주차장 건설 계획은 백지화됐다.

1993년 3월 1만9천533㎡에 이르는 이 지역은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란 이름으로 사적지로 지정됐다.

이어 사유지 매립을 통해 문화재 구역 안에 있는 건물 등이 철거됐고, 1998년 7월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 "사람 체취 묻어나야 생명력 얻어"
7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마무리되자 본격적인 제주목관아 복원 작업이 이어졌다.

복원에 앞서 1998년 12월 30일 목관아의 건물 배치와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탐라순력도'가 약 300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조선 숙종 1702년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도내 각 고을 순시를 비롯해 한 해 동안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리게 하고 간략한 설명을 곁들여 만든 화첩으로 1979년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오랜 세월 경북 영천 이형상 목사의 종가(宗家)에서 보관해왔지만, 제주시의 끈질긴 설득 끝에 매입이 성사됐다.

43면으로 된 가로 35.5㎝, 세로 55㎝ 크기 화첩의 귀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컸다.

탐라순력도가 제주로 돌아온 직후 제주목관아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9년 9월 3일 관덕정 광장에서 제주목관아의 출입문이었던 외대문(外大門) 복원 기공식을 열었다.

목관아의 옛 모습을 되살리기 위한 첫 사업으로 정문 복원부터 시작한 것이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에 제주도민 역시 힘을 보탰다.

도민들은 외대문을 비롯해 목관아 건물 지붕에 사용될 기와 헌납 운동에 동참했다.

제주향교 유림과 목관아 인근 마을 주민, 학생, 주부, 관광객 등이 기와에 자신의 이름과 소원을 새겨 헌와(獻瓦)했다.

[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2000년 5월 외대문이 고풍스러운 옛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어 목사의 집무실이었던 연희각(延曦閣)을 비롯해 연회장인 우연당(友蓮堂), 군관들이 근무하던 영주협당(瀛州協堂) 등 관청건물과 연못 등 부대시설이 복원됐다.

지하 주차장 건설 계획으로 촉발된 제주 지역사회의 문화를 지키고 보전하기 위한 노력은 2002년 12월 제주목관아 복원사업이 완료되며 그 결실을 봤다.

복원사업에는 국비 114억6천400만원, 지방비 60억4천200만원 등 모두 175억600만원이 들었다.

도민과 관광객 1만3천여명, 220개 기관·단체가 헌납한 기와 4만5천여장, 목재는 21만재(10t트럭 10대분)가 들어갔다.

관광객들이 보기에 복원된 제주목관아는 서울의 경복궁, 창덕궁 등과 비교할 때 초라하게 보일 수 있다.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예스러움, 고풍스러운 멋을 느낄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제주도편에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으로 이같이 말한다.

그는 "(제주목관아의) 복원 자체는 철저한 고증으로 차질 없이 이뤄졌다.

그런데도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중후한 연륜을 말해줄 아름다운 나무가 없고 건물에서 사람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며 "새로 지은 관아 건물에서 많은 문화행사를 열어 사람의 체온을 건물에 실어줘야 하고 대문 앞 관덕정 광장에도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한옥은 사람이 들어가 살 때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덧붙였다.

[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 제주에 제야의 종 타종행사 없는 이유
서울을 비롯해 경기·강원·전북·경남·부산 등 주요 지자체는 새해를 맞이할 때 타종 행사를 진행하곤 한다.

하지만 제주에선 타종행사를 하지 않는다.

대신 제주시청 한얼의 집에서 대형 북인 용고(龍鼓)를 치며 새해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제야의 용고 타고' 행사를 연다.

제주목관아에 '종'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제주에 종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최해산(崔海山)이 1434(세종 16년)년 제주안무사로 부임한 당시 불에 탄 제주목관아를 수리하고 다시 지은 경위를 새겨 넣은 '홍화각기'(1435년, 弘化閣記)에 목관아 외대문 2층 누각에 종과 북을 달았다는 기록이 있다.

최해산은 고려말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최초로 만든 최무선(崔茂宣)의 아들이다.

당시 외대문은 일종의 '종루'(鐘樓, 종을 달아둔 누각) 역할을 했으며,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통행 시간을 알리고 성문을 여닫았다.

[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종은 제주성 서남쪽 20리 밖에 있다 허물어진 절간 묘련사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실제로 탐라순력도의 여러 그림에는 외대문에 종과 북이 그려진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1847년(헌종 13년) 이의식 목사가 종에 금이 생기자 이를 녹여 화로와 무기로 만들었는데, 그 이듬해 부임한 장인식 목사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전라남도 영암 미황사에 있는 큰 종을 사들여 다시 매달았다고 한다.

외대문과 종은 1916년 일제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제주목관아 복원 20년에 가깝도록 종이 복원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곤 한다.

서울 보신각 타종 행사처럼 제주에서도 타종 행사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제주목관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 역사문화를 연구해 온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제주목관아를 복원하고도 정작 관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종 복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송구영신의 시기가 되면 제주와 세종시를 제외한 전국 15개 시·도에서 타종행사가 열리고 있다"며 "탐라의 종이 다시 울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시! 제주문화] (46)"하마터면 영영 사라질 뻔"…제주목관아 복원 20년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