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 소식에 시장은 '일단 안도'…파운드화 오르고 국채 금리 하락
"英 트러스, '자유시장주의' 내세워 시장에 맞서다가 끝장났다"
감세정책으로 금융시장을 흔들었다가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 총리에 대해 '자유시장주의를 내세워 시장에 맞서다가 시장에 의해 끝장났다'는 평가가 외신들로부터 나온다.

그의 사임 소식에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오르고 영국 국채 금리는 내리는 등 시장은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차기 총리가 시장을 안정시켜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0일(현지시간) "트러스 총리가 시장에 대항했지만, 시장은 무자비하게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면서 트러스 총리의 운명은 금융시장 혼란이 발생한 3주 전 정해진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감세정책에 대한 시장의 빠르고도 통렬한 판정은 트러스 총리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영국의 명성을 깎아내렸다"고 전했다.

앞서 트러스 총리가 지난달 취임 직후 중앙은행의 통화긴축 기조에 역행하는 대규모 감세안을 내놓으면서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하고 영국 국채 금리가 뛰는 등 시장 불안이 고조됐다.

이에 따른 영국 연기금들의 유동성 부족 사태에 결국 중앙은행이 국채 매입 카드를 꺼내 들고 트러스 총리도 감세 방침에서 물러섰지만, 시장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가운데 결국 사임까지 몰리게 됐다.

트러스 총리는 취임 전부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자유시장주의 경제정책을 주창해왔고,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심각한 가운데서도 취임 후 부유층 감세를 중심으로 한 '트러스노믹스'를 밀어붙였다.

전문가들은 상응하는 지출 삭감 없이 감세를 통해 시장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은 게 트러스 총리의 치명적인 오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영국 킹스칼리지 대학의 조너선 포르테스 교수는 "(기준 금리가 오르는) 잘못된 시기와 (지출을 늘리는) 잘못된 재정정책의 합작품"이라면서 감세를 추진했던 방식에 대해 '제도적 반달리즘(파괴행위)'이라고 혹평했다.

로이터통신은 "트러스 총리의 낙마로 대처식 자유시장주의 경제정책의 부활 움직임이 끝나게 됐다"면서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시장을 떠받들지만 정작 시장은 그들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자유시장경제를 내세우는 영국 싱크탱크 '애덤 스미스 연구소'의 대니얼 프라이어는 "트러스 총리는 자유시장을 애지중지했지만, 바로 그 시장에 의해서 자신의 자유시장주의 정책을 폐기해야만 했다"면서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책은 옳았지만 시기가 잘못됐다"면서, 트러스 총리의 낙마로 감세와 탈규제를 원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의 꿈이 최소 30년은 실현 불가능해질 것으로 우려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시장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면서 "최근의 시장 혼란은 차기 영국 지도자들에게 금융시장을 난폭하게 다루는 데 따른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투자자들은 차기 총리가 시장을 안정시킬 정책을 내놓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가운데 금융시장은 그의 사임 발표에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파운드화 가치는 이날 트러스 총리 사임설이 퍼지면서 1.13달러까지 올랐다가 장 후반 상승 폭이 축소되며 전날보다 0.45% 오른 1.127달러로 마감했다.

30년 만기 국채 금리도 전날보다 0.34%포인트 하락한 3.96%로 장을 마쳤다.

아직 후임 총리가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시장에서는 리시 수낵 전 재무부 장관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이 언제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지 불확실한 가운데 이번 사태로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재정 상태가 취약한 이탈리아나 그리스와 같은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시각도 제기된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세계적 기준금리 인상 흐름 속에 영국 상황이 '탄광의 카나리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