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 '태백산' 암호명 추진 한·소 정상회담…수교원칙 합의
퇴임 이후에도 수차례 방한…DJ 서거에 추모 메시지도
한·러 수교 물꼬 튼 고르바초프…한국 외교사에도 한 획
30일 사망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1990년 한국과의 수교에 물꼬를 트는 등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6월 4일 미수교 상태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소 수교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한국 북방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에 앞서 고르바초프는 같은 해 3월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국제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 회담을 통해 수교 협상에 힘을 싣기도 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를 표방하며 경제개혁, 사회민주화, 대외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자본주의 국가와도 실용적 경제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련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788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소련의 이런 분위기와 외교 지평 확대를 내세우며 공산권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선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정책이 맞물리면서 한소 수교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그렇지만 실제 수교 협상에서는 지루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됐다.

소련은 우선 경제협력 관계를 다지면서 서서히 수교 단계로 넘어가자는 입장을 고수하며 한국의 선수교-후경협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작년 3월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한소 정상회담은 '태백산'이란 암호명 아래 두 달간 극비리에 추진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감한 북방정책 추진에 나선 한국과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을 선언한 소련 간 관계 개선 분위기가 형성되자 북한 김일성 주석이 직접 소련 측에 압력을 가했다.

특히 김일성이 1988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에게 '소련이 헝가리식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를 언급하며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대외 환경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었던 고르바초프가 역사적인 첫 한소 정상회담에 응했다.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극적으로 만난 고르바초프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수교에 관한 원칙에 전격 합의했다.

경협과 외교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는 '빅딜'이었는데, 고르바초프의 결단이 없었다면 전격적인 수교는 어려웠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결국 양국은 1990년 9월 30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외무장관들이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역사적인 수교가 이뤄졌다.

전격적인 수교 이후 고르바초프는 1990년 12월 한국 정상으론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그는 이듬해 4월엔 소련 최고지도자로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도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퇴임 이후에도 2001년, 2008년, 2009년 등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애도 메시지를 내는 등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을 유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