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2015년 3월 15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직후 리커창 총리의 내외신 기자회견이 기억에 남는다. 수많은 사람이 창업하고 혁신한다는 ‘대중창업(大衆創業)·만중창신(萬衆創新)’을 강조하던 리 총리에게 질문이 던져졌다. “창업과 혁신은 시장 규칙에 의한 개개인의 자발적 행위다. 정부 간섭으로 될 일인가.” 리 총리는 “정부는 장애물 제거와 플랫폼 구축에 힘쓸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 중국은 세계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1000개 중 25%를 차지하며 50%를 점유하는 미국을 추격하는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의 ‘판 기술(GPT·General Purpose Technology)’ 인공지능(AI)의 사회적 수용도에서는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경제 6단체장을 만났다. “기업이 자유롭게 투자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정부는 인프라를 만들어 뒤에서 돕고 기업이 앞장서 커가는 게 나라가 커가는 것이다.” 공산주의 중국조차 정부 역할은 규제개혁과 인프라에 있다고 하는 말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한다는 한국에서 굳이 강조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윤 당선인은 “경제가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 당선인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인수위원회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게 그다음 수순일 것이다.

대통령과 경제단체장이 직접 통화할 수 있는 ‘핫라인(hotline)’이 실효성 있는 대안일지는 의문이다. 기업인 출신 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명박 정부가 시도했지만 결과는 짐작하는 그대로다. 대통령과의 직통전화에 불이 붙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새 정부가 하겠다는 ‘책임장관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얘기와 다름없을 것이다.

“공무원이 갑질하면 바로 전화하라”는 당선인 발언도 그렇다. 한국 공무원 정도 되면 법과 제도에 아무 근거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규제를 하고 갑질을 해대는 막가는 수준은 아니다. 설사 그런 공무원이 있다고 해도 핫라인으로밖에 문제를 해결할 채널이 없다면 제왕적 대통령이 이끄는 후진경제로 이미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해외에서 경쟁하는 기업은 국가 대표선수다. (그동안 정부가) 모래주머니 달고 메달을 따오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선인의 이 말도 새로울 게 없다. 세계적 혁신 거점인 미국 실리콘밸리는 둘째치고 공산주의 중국에도 없는 규제가 한국에 수두룩하다. 문제의 근원은 공무원이 아니라 그들이 따르는 법과 제도에 있다. 역대 정부가 규제개혁에 실패한 이유도 규제의 숙주인 법과 제도를 제대로 손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의 실패’는 곧 ‘정부의 실패’요, ‘정치의 실패’다. 윤석열 정부의 규제개혁이 과거의 전철을 반복할지의 여부도 여기서 결판난다.

경제단체장들이 인수위원회에 불려와 규제를 호소하고, 대통령 당선인은 핫라인으로 연락하라고 말하는, 정부 주도 시대의 질긴 유산 같은 장면부터 사라지게 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모두가 ‘대(大)전환’을 말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확률분포도 알 수 없는 모호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싸워야 하는 시대다. 기존의 법과 제도가 상상하지 못하는 수많은 다양한 변종이 튀어나와 서로 경쟁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지배적 표준을 찾아가야 한다. 결국 개인과 기업이 주체가 돼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 정부 역할이 완전히 리세팅돼야 한다.

진화경제학자들은 발견과 발명이 넘쳐나는 ‘과학기술 공간’, 새로운 기업가와 사업모델이 쏟아지는 ‘비즈니스 공간’, 그리고 혁신에 친화적인 ‘법과 제도 공간’이 맞아떨어질 때 산업혁명이 꽃을 피운다고 말한다. 민간 주도 경제로 가는 법과 제도 개혁의 핵심은 정부에서 시장으로의 권력 이동이다. 시장에서도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혁신 세력에 힘이 실려야 한다.

윤 당선인은 인수위에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밑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거창한 그림 내놓을 것 없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이끄는 스타트업을 하기 제일 좋은 국가로 가면 된다. 새 정부가 5년 내내 ‘규제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대통령과 핫라인이 필요 없는 법과 제도 개혁에 올인하는 것은 어떤가. 경제를 살리자는데 여소야대 국회도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안현실 AI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