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세월 뚫고 부활한 압도적 세계관…'매트릭스: 리저렉션'
'빨간 약'과 '파란 약'이 상징하는 철학적 메시지와 쉴새 없이 몰아치는 액션, 시대를 앞서간 촬영기법 그리고 특유의 사이버펑크한 분위기까지.
워쇼스키 자매가 연출한 '매트릭스' 시리즈의 매력을 하나만 꼽기란 어렵지만, 1999년 1편 개봉 당시 세계인들을 가장 전율하게 만든 것은 바로 디스토피아 세계관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며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사소한 선택부터 생각, 심지어 기억까지 설계했다는 게 시리즈 속 세계관이다.

실제 인간들은 흡사 인공 자궁 같은 곳에서 배양돼 기계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역할만 한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일부 인간들은 허상 속에 살기를 거부하고 매트릭스가 만든 견고한 세상을 깨부수기 위해 싸운다.

'매트릭스: 레볼루션'(2003) 이후 무려 18년 만에 나오는 4편 '매트릭스: 리저렉션'에서도 세계관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라나 워쇼스키 감독은 1편부터 출연한 주연 배우들과 손잡고 관객을 매트릭스 속 세계로 잡아끈다.

숨 막히는 매트릭스에서의 경험은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아래에서 분주하지만 성찰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들을 다시 한번 각성하게 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완벽한 부활이다.

20년 세월 뚫고 부활한 압도적 세계관…'매트릭스: 리저렉션'
'레볼루션'에서의 일이 있고 20년 후, 가상현실을 살아가는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게임 회사에서 개발자 토머스 앤더슨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만든 3부작 게임이 바로 매트릭스다.

지난 시리즈에서 네오가 겪은 일들은 AI에 의해 게임으로 둔갑했다.

네오는 이따금 실제로 겪은 '진짜 기억'이 불쑥불쑥 일상을 파고들어 괴로워하지만, 심리치료사(닐 패트릭 해리스)는 게임과 현실을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연히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와 마주친 뒤 네오의 정신 착란 증세는 더 심각해진다.

평범한 엄마이자 아내 티파니로 사는 트리니티 역시 지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매트릭스 게임 속 여주인공에게서 막연한 기시감을 느끼고 그가 자신을 닮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다 저항자들이 만든 옛 지하도시 '시온'의 리더 모피어스(야히아 압둘 마틴 2세)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모피어스는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네오 눈앞에 내민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진실에 눈감는 대신 지금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고, 빨간 약을 먹으면 일상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진실에 눈뜰 수 있다.

고민 끝에 빨간 약을 집어삼킨 네오는 인공 자궁에서 깨어난다.

이후 모피어스와 벅스(제시카 헤닉) 일행에 합류한 그는 연인이자 동지였던 트리니티를 깨울 계획을 세운다.

어렵사리 구출해낸 트리니티도 비로소 현실을 자각하게 되고, 두 사람은 더 발전한 기계들과 전쟁을 시작한다.

20년 세월 뚫고 부활한 압도적 세계관…'매트릭스: 리저렉션'
기술이 발전한 만큼 액션 장면도 진화했다.

특히 오토바이를 함께 탄 네오와 트리니티가 펼치는 추격전은 저절로 숨을 멈추게 한다.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수백 명의 적을 요리조리 피하며 염력으로 자동차를 밀어내거나, 손을 맞잡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 등은 과거 시리즈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동시에 할리우드 기술력의 정점을 느끼게 만든다.

배우들은 워쇼스키 감독이 짜 놓은 무대 위에서 마음껏 활개 친다.

리브스는 예전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처럼 동양 무술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액션 연기를 선보인다.

모스도 리브스와 함께 한 달 전부터 촬영장을 본뜬 구조물에서 훈련을 받아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영원히 결별한 줄 알았던 네오와 트리니티가 한 화면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트릭스' 팬들의 오랜 갈증은 풀릴 것 같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 채 재회하는 연인의 모습은 이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관객들에게까지 먹먹함을 전할 듯하다.

두 사람은 극 종반부 결정적인 장면에서 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영화 캐릭터들 역시 '사랑의 힘'을 몇 번이고 강조한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달랠 수 있는 이야기를 상상하고 싶어 대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워쇼스키 감독이 '리저렉션'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도 결국 사랑이 아닐까.

22일 개봉.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