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드미트리 시쉬킨이 연주한 '라 캄파넬라'/드미트리 시쉬킨 유튜브 채널

오늘날 K팝 아이돌을 향한 팬들의 사랑은 무척 뜨겁습니다. 노래와 춤은 물론, 그들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열광하죠. 이렇게 K팝뿐 아니라 클래식, 뮤지컬 등 특정 장르나 아티스트에 매료된 팬들을 '마니아(mania)'라고 하는데요.

강력한 팬덤의 원조를 꼽는다면 단연 이 사람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입니다. 리스트의 팬덤 자체를 부르는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란 용어가 있었을 정도죠.

리스트의 인기는 K팝 아이돌 못지않게 폭발적이었습니다. 리스트의 연주가 시작되면 무대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 실신하는 사람, 그가 버린 시가 꽁초나 마시고 남긴 홍차 찌꺼기를 가져가는 사람 등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연주회를 마치고 마차를 타고 떠나면 수십 대의 마차가 그 뒤를 쫓아갔다고 합니다.

리스트도 이런 인기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연주가 끝나면 일부러 피아노 위에 장갑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면 다들 그 장갑을 차지하려 난리가 났죠.

과연 리스트의 뜨거운 인기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는 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 등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피아노 실력이었습니다. 현란한 기교로 선보인 그의 피아노 연주에 다들 흠뻑 빠져들었던 겁니다.

단순히 테크닉만 뛰어났던 게 아닙니다. '라 캄파넬라' '녹턴 3번 사랑의 꿈' 등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듣고 사랑하는 작품들을 남겼죠.

다들 리스토마니아가 될 준비가 되셨나요. '19세기 클래식계의 아이돌' 리스트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프란츠 리스트./위키피디아
프란츠 리스트./위키피디아
리스트는 헝가리 라이딩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지 백작 가문의 집사였는데요. 이 가문의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연주자로도 일했습니다.

덕분에 리스트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의 뛰어난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죠.

당시 여러 음악가들의 부모님은 모차르트가 음악 영재로 이름을 알린 것을 롤 모델로 삼았습니다. 베토벤의 아버지도 그랬고, 리스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음악 영재로 키워 널리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악기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국제적인 음악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모국어 대신 독일어를 쓰게 했습니다.

아들이 뛰어난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도 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백작에게 아들의 연주를 들려주며, 이사를 허락받고 후원금도 받아냈죠.

그렇게 리스트는 두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피아노 교육은 카를 체르니가 맡았습니다.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게 되는 '체르니 100' '체르니 30' 등의 주인공이죠. 피아노를 어느 정도 배웠는지 물을 때도 "체르니 몇 번까지 쳤어?"라는 질문을 종종 합니다. 베토벤의 가르침을 받았던 체르니는 리스트를 자신의 제자로 삼고 다양한 기법을 알려줬습니다.

화성법, 관현악 편곡 등은 또 다른 선생님에게 배웠는데요. 모차르트 얘기가 나오면 항상 함께 언급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입니다. 음악사에 이름을 길이 남긴 두 인물을 모두 스승으로 모셨다니 리스트에겐 대단한 영광인 것 같습니다.

그는 체르니를 통해 베토벤을 만나는 기회까지 얻었습니다. 리스트가 11살이었을 때인데요. 베토벤, 체르니, 리스트 이 세 음악가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만으로 정말 의미가 깊은 것 같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어린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감동을 받아 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가 연주한 '녹턴 3번 사랑의 꿈'/ DW클래시컬뮤직 유튜브 채널

하지만 리스트 가족은 빈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리스트는 연주회를 열어 살림에 보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이보다 더 욕심을 냈습니다. 리스트도 모차르트처럼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돈도 많이 벌게 했죠.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이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리스트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외국인이란 이유로 거부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82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리스트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가 때로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공백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6세란 어린 나이에 가장 역할도 해야만 했습니다. 방황을 거듭하던 리스트는 모든 걸 내려놓고 성직자가 되려는 결심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독려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음악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 레슨으로 계속 돈은 벌어야 했지만 연주회는 줄였습니다. 대신 음악 공부와 독서에 충실히 임하며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그렇게 21살의 청년이 된 리스트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의 음악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죠.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니콜로 파가니니입니다.

파가니니는 '24개의 카프리스' 등의 곡을 현란한 기교로 선보이고, 자유로운 즉흥 연주도 즐겨 청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는 이상 저런 연주를 할 수 없다"라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리스트는 그에게 한껏 매료됐습니다. 리스트는 이전까지만 해도 체르니의 지도를 받아 정확한 템포를 지키던 연주자였는데요.

이때부터 파가니니처럼 고난도의 기교를 뽐내며 화려한 연주를 하는 '비르투오소'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

리스트는 이를 위해 매일 10시간 넘게 연습하며 실력을 갈고닦았습니다. 많은 기교를 보여주기 위해 연구와 곡 작업에도 매진했습니다.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연주한 '마제파'. 도이치그라모폰 유튜브 채널


리스트의 대표작 '라 캄파넬라'도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주제를 기반으로 만든 겁니다. '라 캄파넬라'는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 기교 연습곡>, 이를 개정한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에 담긴 6곡 중 가장 유명합니다. 건반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테크닉들을 모두 담고 있는데요. 오늘날까지도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자주 연주하고 있습니다.

리스트는 이 곡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한 번에 빠르게 훑고 가기도 하고, 8~9개의 음을 동시에 누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연주 활동뿐 아니라 사랑에도 열정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죠.

먼저 7살 연상이자 아이도 있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졌는데요. 두 사람 사이엔 3명의 자식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훗날 리스트의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됐고, 두 사람의 관계는 10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후 리스트는 8살 연상의 캐롤린 자인 비트켄슈타인 공작부인과 만나게 됐습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꿈꿨지만 실패했습니다.

공작부인이 남편을 상대로 낸 혼인 무효 승인을 교향이 끝내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리스트는 54세에 종교에 귀의해 성직자가 됐습니다.

그의 음악은 화려한 기교와 스캔들로 인해 오히려 과소평가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리스트의 음악 세계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녹턴 3번 사랑의 꿈' 또한 정말 아름답고 감미롭습니다.

그는 1854년 '타소'라는 작품으로 '교향시(Symphony Poem)'를 창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교향곡(Symphony)은 보통 4악장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교향시는 한 악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교향적(symphonic)'이란 단어와 '시(poem)'란 단어가 결합된 만큼, 문학적·서사적 특징도 두드러집니다. 리스트는 '마제파' '햄릿' 등 총 13편에 달하는 교향시를 만들었습니다.

19세기 클래식계 아이돌 리스트는 그저 재능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체르니도 그를 보고 "이렇게 열정적이고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은 처음"이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그토록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리스트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되는 슈퍼스타가 된 것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