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다면…

미국의 완승, 중국의 완패가 점쳐졌던 미중 무역전쟁이 3년이 지났지만 예상과는 달리 흘러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무역흑자 2000억달러 축소를 목표로 중국을 압박했지만 중국의 무역흑자는 줄지 않고 있습니다. 미중간의 1단계 무역합의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와 미국의 정권교체로 유야무야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중국경제의 좌초를 목표로 무역전쟁을 벌였지만,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가 플러스(+) 성장을 하는 바람에 미중의 경제력 격차는 벌어지기는커녕 더 축소됐습니다. 1995년 일본이 최전성기였을 때 미국 대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수준이 71%선이었는데, 2020년 중국 GDP가 미국의 70%에 달했습니다. 이런 추세면 올해는 73%를 넘어 과거 세계 2위였던 소련(현 러시아), 일본의 수준을 뛰어 넘는 역대 최강 라이벌로 등장할 판입니다.
(자료 = IMF,중국경제금융연구소 예측)
(자료 = IMF,중국경제금융연구소 예측)
서방은 '중국 위기론', '중국 붕괴론'을 고장난 시계처럼 반복하지만 중국은 아직 멀쩡합니다. 중국이 부채비율 때문에 망한다고 하지만 올해 들어 중국은 전세계 주요국 중 유일하게 부채비율을 낮춘 나라가 되었습니다.

2021년 '포춘 500대 기업' 수를 보면 중국은 2020년보다 14개사 늘어난 143개였고, 미국은 4개사가 줄어든 122개로 2위에 그쳤습니다. 2년 연속 중국이 미국을 넘어선 것입니다. 2011년 이후 10년간 포춘 500대 기업에 등극한 기업 수 증가를 보면 중국은 74개사가 늘었고 미국은 11개사가 줄었습니다.
(자료 = 포춘)
(자료 = 포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호랑이의 기세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젠 미국도 혼자서는 중국 통제가 안 되자 우방을 동원한 동맹전략으로 작전을 바꿨지만 아직 별 성과는 없습니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 전세계 주요 국가들이 중국 견제에 동의는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중국의 경제력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중국이 최대 무역 대상국이고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는 63%를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는 지금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형국입니다. 호랑이의 등은 올라타면 초고속으로 달리는 쾌감을 즐길 수 있지만, 호랑이는 말이 아닙니다. 등에 탄 사람이 통제할 수 없고, 쉽게 뛰어 내리지도 못합니다. 잘못 뛰어 내리면 중상 아니면 사망입니다.

결국 호랑이가 지친 틈을 타 내려오든지, 호랑이가 혹해 꼼짝 못할 기가 막히게 달콤한 떡을 주면서 달콤한 떡에 취한 호랑이에게 재갈을 물려 달리게 만들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반도체, 기술개발과 양산은 별개 문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기술의 최강자는 미국입니다. 실리콘베이스의 반도체는 반도체 '원조 할매집' 미국의 특허와 기술을 피해 갈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있다고 해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50여개 이상의 고난도 핵심공정을 거쳐야 겨우 만들어지는 최첨단 반도체생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반도체의 기술개발과 양산은 별개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언론에서 대만 TSMC 주도의 5nm, 3nm, 2nm 기술개발 경쟁을 얘기하지만 그건 실험실에서의 이야기고 5nm, 3nm, 2nm 공정 제품 만들려면 250억달러 이상의 투자비와 최첨단 장비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실제로 세계 최강 반도체 기술을 가진 미국 반도체 산업의 세계 생산비중은 12%에 불과합니다.
반도체공정 기술별 참여기업 (자료 = IHS)
반도체공정 기술별 참여기업 (자료 = IHS)
그래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 대만 기업과의 동맹을 통해 이들 기업을 미국으로 불러들이려 유혹과 압박의 '양면 작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최첨단 5nm공정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은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 둘 뿐이고 미국 기업은 없습니다. 지금 세계 반도체 시장은 기술이 아니라 생산이 '갑'입니다.

다만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의 양대 산맥인 TSMC와 삼성도 쩔쩔매는 기업이 있습니다. 5nm이하 핵심공정에 필수 불가결인 노광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의 작은 기업 ASML입니다. 전세계 극자외선(EUV) 노광기 점유율 100%인 진짜 숨은 강소기업, 히든 챔피언이지요. 삼성도 TSMC도 인텔도 ASML에 지분을 넣었지만 장비 구입에 쩔쩔매고 있습니다.

2015년에 TSMC는 지분을 전량 매각했고 인텔과 삼성은 아직도 각각 3%, 1.5% 지분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 3대 반도체 제조기업은 '을'이고 ASML이 '슈퍼 갑'입니다. 천하의 삼성도, TSMC도, 인텔도 달리고 싶어도 ASML의 EUV노광기 없으면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해 달려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반도체 공정기술과 ASML의 EUV노광기. (자료 = ASML)
반도체 공정기술과 ASML의 EUV노광기. (자료 = ASML)
바이든 대통령이 주재한 미 백악관 반도체 회의에서도 할 말 다하는 회사가 바로 ASML입니다. 중국도 ASML의 EUV 노광기를 사려고 별 짓 다해보지만 ASML은 미국의 기술제재를 핑계로 애만 태우고 있습니다.

똑 부러지는 독보적 첨단기술 하나면 미국도 중국도 두렵지 않고 천하의 삼성, TSMC, 인텔에게도 재갈을 물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중 기술전쟁 와중에서 한국의 길은 바로 ASML이 간 길 외엔 답이 없습니다. 미중도 넘보지 못하는 독보적 기술과 제품만 있다면 달리는 호랑이에게도 재갈을 물릴 수 있습니다.

기술은 시장을 못 이긴다!

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결국 기술은 시장을 못 이깁니다. 한국이 일본과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전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시장을 가진 한국이 이겼고, 표심에 함몰된 일본 정치인들 장단에 코 꿰인 일본 기업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떠 안았습니다. 시장과 기술에 대한 정치권의 무지가 만든 대참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도체 기술 최강국 미국이 중국과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노트북, 핸드폰, 디지털 TV에서 세계 1위의 생산 및 소비국가라는 중국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미국은 기술을 쥐고 있지만 중국은 시장을 쥐고 있습니다. 미국반도체협회(SIA)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수주 점유율은 중국이 36%, 미국이 20%선입니다. 그런데 중국 세관의 반도체 수입 통계를 보면 2020년에 중국은 전세계 반도체 시장 4638억달러의 80.1%에 달하는 3500억달러어치의 반도체를 수입했습니다.
(자료 = SIA, 중국해관통계)
(자료 = SIA, 중국해관통계)
세계 최대의 노트북, 핸드폰, 디지털TV 생산국이다 보니 여기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중국이 세계 최대 소비시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를 제재하면 중국이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전에 미국의 시가총액 1위 기업 애플의 주가가 폭락하고 미국 반도체 회사들 주가도 폭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플은 모든 애플 제품을 중국에서 주문자상표 생산방식(OEM)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 반도체와 장비회사들도 중국이 최대 매출처라 그렇습니다. 기술을 가진 미국이지만 공장과 시장을 가진 중국에 대한 봉쇄와 제재에는 고민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중국 반도체업종 주가상승 이유 있다

중국이 앤트파이낸셜 같은 핀테크 기업에 대한 금융규제를 시작으로 △알리바바, 텐센트 등 플랫폼 기업에 대한 반독점 규제 △디디추싱 같은 모빌리티 기업에 대한 데이터 보안 규제 △메이투완 같은 딜리버리 기업에 대한 노동자 보호규제 △신동방 같은 사교육업체들에 대한 비영리화 규제 등 정부 규제조치로 중국 증시가 조정을 받았습니다. 이들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중국과 중국 정부에 정나미가 떨어질 판입니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자본시장 충격을 고려한 정책이나 규제에 대한 인식은 서방국가와 달리 낮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서방국가의 눈으로 보면 매우 과격한 규제 조치를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국은 정부 입김이 강한 나라입니다. 어느 나라에 투자하든지 간에 "정부와 맞서지 말라"는 말은 철칙입니다. 중국 정부가 강한 규제를 한 플랫폼 기업들은 세게 조정을 받았지만, 정부가 국산화와 육성에 목매는 산업은 시장 전반의 조정과 상관없이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미국이 동맹전략으로 중국을 봉쇄하겠다는 반도체와 배터리 업종입니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견제를 계기로 반도체를 '산업의 심장'으로 격상시키고 정책, 자금, 세제, 인재공급을 국가 총력체제로 육성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28nm급의 반도체 기술을 가진 기업이면 10년간 법인세 25%를 감면하는 파격 조치를 시작으로 반도체 장비 수입시 관세 면제, 기술주 시장에 최우선 상장, 반도체 학과 신설 수준을 넘은 '반도체 대학' 설립 줄허가 등으로 반도체 인재공급을 무한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중국은 석유 자동차에서는 기술력에서 뒤졌지만 전기차에서는 세계 시장을 리드할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내수확대에 가장 중요한 전략산업으로 신에너지 자동차를 밀고 있습니다. 전기차는 시장 확대에 박 터지게 경쟁하고 있지만, 전기차는 누가 생산하든 배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배터리 회사들이 대박 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떨어지는 것과 올라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국 투자자는 중국의 정책과 산업을 깊고 냉철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증시 수급이나 차트만 보고 투자하는 경향이 큰 것 같습니다. 또한 떨어지는 쪽에 너무 함몰돼 올라가는 쪽을 등한시하는 경향도 있어 보입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소비 시장을 가진 중국 상황과 정부가 '슈퍼 갑'이라는 중국이라는 특성을 감안하고, 정부가 파격 지원을 하는 반도체와 전기차 업종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업종 주가 강세는 이유 있어 보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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