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개발체제로 타오른 한민족 기업 의지…'한강의 기적' 일궜다
한강 변의 기적

‘한강 변의 기적’이란 말이 맨 처음 언론을 탄 것은 1960년이다. 그해는 쥐의 해였다. 그해 정월 초하루 동아일보는 “서독은 패전의 잿더미에서 ‘라인강 변의 기적’을 일으켰는데, 우리는 아직 전기가 부족하여 송전을 통제하고 있으니, 어두컴컴한 곳만 찾아드는 쥐의 신세와 같은지라 언제 ‘한강 변의 기적’이 일어나 쥐구멍에 볕들 날 있겠는가”라는 가십을 게재했다.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수치가 알려진 104개국 가운데 86위였다. 한국은 캄보디아(84위), 나이지리아(85위), 케냐(87위), 방글라데시(88위)와 함께 빈국의 대열에 속했다. 한강 변의 기적은 그런 처지의 한국 경제에서 새어 나온 신세한탄과 같았다. 고도성장 개시와 더불어 그런 넋두리는 말끔히 가셨다. 1970년대 들어 한강 변의 기적은 자신의 특별한 성취에 큰 자부심을 표하는 국민적 구호로 바뀌어 있었다.
현대중공업이 1973년 처음 수주한 26만t급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를 건조하는 모습.
현대중공업이 1973년 처음 수주한 26만t급 유조선 ‘애틀랜틱 배런’호를 건조하는 모습.
1971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은 3선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나는 앞으로 중화학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고,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장차 무슨 일을 벌일지 국민에게 미리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고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또 치산녹화사업을 벌였고 새마을운동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을 추진할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또 한 번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 변으로 확산시켜 이 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다짐은 1980년대 후반에 현실화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그간 이 나라가 이룩한 경제적 성취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한국인의 축제였다. 서울올림픽이 공산권의 해체를 촉진했다는 지적은 빈말이 아니었다. 제3세계를 풍미한 종속이론이 사라진 것도 한국이 경제성장의 교과서를 다시 썼기 때문이다.

1988년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을 회원국으로 초청했다. 노태우 정부는 신중하게 초청을 거부했지만, 한국 경제가 중진국 상위권에 도달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1997년 한국 경제의 GDP 규모는 세계 192개국 가운데 11위에 올랐다. 중진국 상위권을 넘어 선진국 하위권에 진입한 셈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기적과도 같은 성취를 가능하게 했는가.

한국형 개발체제

가장 큰 공로가 혁신적인 한국형 개발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후계자들, 그리고 그에 협력한 기업가들에게 돌려져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형 개발체제의 핵심은 국가경제를 세계 경영의 단위로 편성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넓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비교우위를 찾고 개발하는 자세, 비교우위를 실현하기 위해 이웃 나라 일본과 마음을 열고 협력하는 자세, 정부와 기업과 종업원이 한마음으로 공동의 목적을 향해 몰입하는 자세,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과 기술을 찾아 국가경제의 선진화를 추구하는 자세가 한국형 개발체제의 행동원리다.

누가 가르쳐준 길이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 대부분 경제학자는 세계 경영을 위한 국가경제가 아니라 그와 무관한 자립적 국민경제를 촉구했다.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하면서 조화롭게 천천히 가야 한다고 했다. 중화학공업은 정부가 맡을 일이지 민간기업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대개 국가자본주의자로서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대중경제론을 지지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소수 기업가를 선발해 중화학공업을 맡기자 나라 경제가 망하는 길로 들어섰다고 아우성쳤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들이 학계와 관계의 주류를 점했다. 그들은 한국형 개발체제를 두고 정부가 부당하게 시장에 개입해 자원 배분을 왜곡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1960~1970년대의 한국 경제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일 만한 시장은 없었거나 미숙했다. 시장은 정보와 자원의 효율적 배분 기구다. 역사의 어느 국면에서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통제는 시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대체하는 가운데 오히려 시장을 육성한다. 경제학자들은 그 같은 정부와 시장 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몰역사적 비판과 성급한 자유화 정책은 1990년대에 이르러 국가경제의 위기를 초래하고 한국형 개발체제를 해체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 조망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한 고도성장의 주역들은 자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신천지를 개척한 듯 자처했지만, 그 역시 몰역사적인 과장이다. 이 세상에 기적은 없으며, 다 있을 만한 일이 일어날 뿐이다. 그들은 역사가 남긴 자산을 밑천으로 현명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 연재는 한국에서 정착 농경이 성립한 이후의 긴 문명사를 추적해왔다. 15세기 들어 세대복합체가 해체되고 개별가족이 사회생활의 기초 단위로 분리됐다. 17~19세기에는 초보적 수준의 시장경제 위에서 소농사회가 성립했다. 소농은 장시간 노동을 견디고,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후대를 위해 저축하는 능력을 전제한 경영체다. 세계사에서 소농사회가 들어선 지역은 서유럽과 동아시아로 한정된다. 이 지역에서 유달리 근대적 경제성장이 순조로웠던 것은 ‘경제하려는 의지’의 인간군이 소농사회의 터전에서 성숙했기 때문이다.

1962~1997년 세계 147개국의 1인당 실질소득은 평균 두 배 증가했다. 그 사이 한국인의 실질소득은 11배 늘었다. 세계 최고의 성장이었다. 반면 정체하거나 후퇴한 나라도 있었다. 북한(1.0배), 필리핀(1.5배), 소련(1.0배), 아르헨티나(1.5배), 쿠바(1.1배), 가나(0.9배) 등이다. 왜 어떤 나라는 성공하고. 어떤 나라는 실패하는가. 운명의 갈림길은 제도였다. 그렇다면 언제, 누가 이땅에 시장경제의 제도와 기구를 구축했는가. 늘 한국인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야기지만, 이 땅에 시장경제 체제를 이식한 것은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권력이었다. 그 체제를 대한민국은 근대문명이라 하여 계승했다. 그 현명한 선택이 그 모든 것을 부숴버린 북한과 하늘과 땅의 차이를 초래했다.

1963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한국 경제가 공산품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한국 경제에 살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 길을 달린 최초의 주자는 철강, 합판, 면직물 공업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가 붉은 마음으로 건설한 공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 대해 한 번도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은 이후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했다. 길거나 짧은 역사로부터 박정희 시대가 물려받은 유산은 컸다. ‘한강 변의 기적’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그 역사적 유산에서 일어난 것이다. 가장 값진 유산은 역사적으로 성숙해온 한국인의 기업가 능력과 엔지니어링 능력이었다.

대규모 기업집단

고도성장의 과정에서 흔히 재벌로 불리는 ‘대규모 기업집단’이 성장했다. 재벌의 기원은 1950년대까지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성장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부터였다. 박정희 정부는 주요 공업 육성에서 자금과 기술 능력을 갖춘 소수 대기업을 선별 지원했다. 이는 대규모 기업집단이 성장할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전두환 정부는 공정거래법을 제정해 대규모 기업집단의 확장을 억제했다. 그럼에도 대규모 기업집단의 성장세는 멈추지 않았다.

1987년 30대 기업집단의 매출이 전체 국내 기업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6%로,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불완전해 투자자금이나 인적 자본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할 때 그것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합리적인 조직으로 기업집단이 형성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 요인을 추가하면 한국에서 대규모 기업집단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그 활동무대가 세계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기업의 성장을 걱정하는 참모들에게 세계 시장에 나가면 구멍가게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누가 옳은가. 고도성장기 한국의 대기업은 규제해야 할 독점기업인가, 키워야 할 구멍가게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문제로 주어지는, 한국인만이 답을 알지 못해 다투기만 하는 퀴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