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 주문 읽은 이정미…사시·연수원 첫 동시수석 서동우
사법연수원 16기(1985년 입소)는 ‘여성 파워’라는 말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1명씩 배출했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전체 수료생 307명 중 여성은 5명이었다. 16기는 정치권에선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16기로 입소했지만 복통으로 중요한 시험을 치르지 못하면서 17기가 됐다. 다른 기수에 비해 ‘스타플레이어’가 적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지만 변호사업계를 놓고 보면 사정이 다르다. 해박한 전문지식으로 각 분야에서 첫손에 꼽히는 변호사가 즐비하다는 게 법조계 평가다.

여성 수료자가 ‘무려’ 5명

16기 여성 법조인들은 입소 때부터 화제가 됐다. 한꺼번에 ‘무려’ 5명이나 연수원 문턱을 넘어섰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입소한 49기 연수생 여성 비율이 42.6%(61명 중 26명)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적지만 당시에는 전체 여성 법조인이 20명을 밑돌던 시기였다.

16기에서 최고재판소까지 올라간 인물은 박보영 전 대법관과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다. 박 전 대법관(재임기간 2012~2018년)은 지금도 재판을 하고 있다. 그는 대법원에서 나와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여수시법원에서 ‘시골판사’가 됐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은 대형 법무법인(로펌), 대학 등으로 가거나 개업을 선택했지만 박 전 대법관은 달랐다. 시·군법원에서 소액사건을 전담하는 판사를 자처해 다시 법복을 입었다. 사법 사상 처음 있는 일로 ‘전관의 후광’을 깨끗이 포기했다는 점에서 법조계에 귀감이 됐다.

이 전 재판관은 2017년 퇴임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뒤를 이어 소장 대행까지 맡았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21분여간 선고 주문을 직접 읽으면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6기 출신의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공교롭게도 법원에서 남성 동기들의 관운이 따르지 않았다”며 “박 전 대법관이나 이 전 재판관이 큰 역할을 해 존경하고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16기 남성 중에서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유력한 대법관 후보로 꼽혔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휘말렸다. 이경춘 초대 서울회생법원장은 지난달 14일 퇴임했다. 다만 법조계에서는 16기 남성 판사들이 여전히 법원 요직에 포진해 있기 때문에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기정 서울서부지법원장, 최규홍 서울동부지법원장, 김용석 서울행정법원장, 윤준 수원지법원장 등이 16기다. 검찰에서는 김현웅 전 법무부 장관과 김수남 전 검찰총장이 나왔다.

변호사업계 전문가 ‘즐비’

정치권 등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변호사업계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기업 인수합병(M&A)과 지식재산권, 조세, 노동, 부동산, 국제중재 등에서 프런티어(개척자)와 스페셜리스트(전문가) 소리를 듣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간판스타’이자 M&A 전문가로 손꼽히는 서동우 변호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서 변호사는 사상 처음으로 사법시험(26회)과 연수원 수석을 동시에 거머쥐며 법조계 주목을 끌었다. 연수원 성적이 좋으면 판사나 검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서 변호사는 곧장 로펌행을 택했다. 그는 하나금융지주의 외환은행 인수, 하이닉스반도체의 주식 매각, 유안타증권의 동양증권 인수 등 수조원대 ‘메가 딜’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윤병철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한국 국제중재산업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국제상업회의소(ICC) 상임위원을 비롯해 세계적인 국제중재기관에서 중재인으로 활동하며 글로벌 인지도를 확보했다.

대형 빌딩 매각 법률자문에서는 한봉희 율촌 변호사가 발군의 성적을 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서울스퀘어 건물,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의 서울 SK본사 건물 매입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권영모 광장 변호사는 지식재산권 분야 국제 전문가다. 미국 특허소송에서는 권 변호사 같은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 많다. 그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스마트폰 관련 특허침해소송, 포스코와 신닛테쓰스미킨(新日鐵住金)의 전기강판 관련 특허침해소송, 코오롱과 미국 듀폰사의 탄소섬유 관련 영업비밀침해 소송 등 굵직한 특허소송을 진행해왔다.

조세 분야에선 정병문 김앤장 변호사와 변희찬 세종 변호사 명성이 높다. 정 변호사는 법원 조세팀 재판연구관 출신으로 업계에서 세무조사 및 조세 쟁송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변 변호사는 각종 조세 소송과 환경침해 소송 등에서 활약 중이다.

박상훈 화우 대표변호사는 노동법 전문가다. 부장판사 출신인 박 변호사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근로자들의 백혈병 사태를 해결한 주역이다. 근로자 5명을 대리해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고 2명에 대한 배상을 인정받았다. 그는 재판 결과를 근거로 근로자 150여 명이 삼성전자와 보상 합의를 할 수 있도록 중재했다.

박재필 바른 대표변호사는 공정거래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그는 경인운하 담합 의혹에 휘말린 SK건설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50억원대 과징금 취소 소송에서 SK건설의 완승을 이끌어냈다. 과징금 산정 문제를 다툰 게 아니라 담합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해 공정위 관련 사건의 주요 사례가 됐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