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연금에 대한 청와대 차원의 외압 의혹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으면서 자산운용업계가 촉각을 세우고 있다.

이번 사태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서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7월 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결의를 위한 임시 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진 자산운용사는 한 곳도 없었다.

자산운용업계에서 삼성물산 보유지분이 가장 컸던 한국투신운용 등 의결권을 쥔 자산운용사들이 일제히 합병에 찬성했고, 상당수는 임시주총을 전후로 찬성 사실을 공표하기도 했다.

삼성그룹주 펀드를 운용하는 한국투신운용이 당시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은 약 466만주로 지분율은 2.85%였다.

나머지 운용사들의 삼성물산 지분은 대체로 10만∼20만주(지분율 0.1% 안팎)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일각에서는 삼성물산에 현저히 불리한 것으로 평가됐던 합병 비율(삼성물산·제일모직 1대 0.35)에도 운용사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뒤늦게 나오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이 외압에 따른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판받는다면 불특정 다수 고객의 돈을 받아 굴리는 운용사들도 외압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자산운용사들이 당시에 국민연금이나 삼성의 입장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운용사들이 당시 국민연금과 상반된 입장을 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지분을 10% 넘게 보유했던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기로 한 마당에 자산운용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산운용사들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찬성에 대해 각사 내부의 정해진 의사 결정 절차를 거친 합당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투신운용의 한 관계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식을 다 보유한 우리로서는 합병이 부결됐을 때 불확실성이 커져 향후 주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더 주목했다"면서 "내부 위원회에서 찬반 투표를 거쳐 다수결로 합병 찬성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투신운용은 작년 주총 당일 "장기적으로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기업가치 제고 가능성이 인정된다"며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주식을 동시 보유해 합병에 찬성하는 것이 펀드 수익자의 수익률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찬성 입장을 공표했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의 합병 찬성이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국민연금에 대한 외압 의혹이 빌미가 되어 금융당국이 경위 조사라도 나선다면 피곤해질 수 있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hyunmin623@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