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체 제안'만 쏟아내고 합의는 뒷전…여야 머리 맞대지 않아 '공염불'
與 "거국내각 구성 협상이 우선" vs 野 "대통령 권력이양부터 약속해야"
野 내부에선 민주-국민의당 주도권 경쟁…與도 주류·비주류 대치 계속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의 쓰나미에 세계 11위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국정이 사실상 공백 상태에 빠져 신음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불거진 이후 3주 동안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장악력을 상실한 채 존재감을 보이지 않고 있고, 황교안 국무총리도 사퇴가 기정사실화하면서 행정부 전체가 통째로 마비된 모습이다.

'트럼프 변수'로 한반도 정세와 무역 환경이 우리나라에 불리한 쪽으로 급변할 조짐을 보이고,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는데다, 세계적 경기 침체의 그늘이 가시화하는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 상황에서 닥친 행정부의 '실종'은 커다란 국가적 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비상 상황에서 행정부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어야 할 국회와 정치권 역시 '초당적 비상 체제'를 가동해 힘을 모으는 대신, 정치 공방만 주고받으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점은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국민이 선출한 가장 강력한 권력인 대통령이 권위와 신뢰를 잃은 상태에서, 이를 대체할 유일한 전국 단위 선출직인 국회의원들 역시 국민 앞에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국정 공백의 장기화가 현실화될 수도 있는 상황까지 몰렸다.

특히 여야 모두에서 '비상회의체'를 구성하자는 제안과 이른바 '정국 수습 로드맵'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총의를 모으지 못하는 현상은 제20대 국회의 정치력 실종과 위기 대처 능력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국회가 '정국 수습 주체'가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회의장과 여야 3당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거국내각 구성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으나 야권은 묵묵부답이다.

여권 원로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책임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역할 수행→헌법 개정→대통령 하야'로 이어지는 '질서있는 퇴진' 로드맵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중진인 박영선 의원이 국회법 제36조에 따른 '비상시국 전원위원회' 소집을 통한 거국중립내각 논의를 제안했다.

김영춘 의원은 '대통령 퇴진 공표→영수회담을 통한 거국내각 구성과 대선일정 합의→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 사퇴 시까지 정치적 협의 테이블 배제→국회 제정당의 거국중립내각 총리 추천과 인준→총리 인준 뒤 대통령 권한 위임 선언과 합의된 대선일 60일 전 사퇴'로 이어지는 5단계 정국 수습 방안을 내놓았다.

국민의당에서도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시국 수습방안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선언→여야 합의 총리 추천 임명→ 총리가 주도해 대통령 퇴진 시기를 포함한 향후 정치일정 확정' 등을 골자로 하는 3단계 해법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 등 비주류 일부는 헌법 준수를 부각하며 '탄핵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다.

이처럼 각종 제안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지만 여야 구성원 모두 각각의 해법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모두 '공염불'로 쌓여가고 있다.

여야 간 상호작용으로 해법을 한데 모으고 보완해가는 작업이 아예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이 같은 정치 실종 현상은 이들 각각의 수습책에 차기 대권까지 고려한 정치적 셈법이 깔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야 모두 초당적 회의체의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한 마디로 '동상이몽'이다.

야당 의원들의 제안은 박 대통령의 퇴진 또는 2선 퇴진을 전제로 한 것인 반면,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는 우선 거국내각 협상부터 시작하고 대통령의 2선 후퇴를 논의하자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야권은 박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상징적 존재로 남으면서 야권이 추천하는 과도내각의 총리가 권력을 사실상 완전히 이양받는 방안을 선호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야권이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지배하면서 사실상 국정을 주도하는 동시에 사법부인 검찰과 법원의 인사권도 좌우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야권으로의 조기 권력 이양 효과를 내는 동시에 차기 대선을 원래 예정된 내년 12월에 치르든 조기에 치르든 간에 야권이 매우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야권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펼쳐지면서 야권 내부에서도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각각 정국 수습의 주체가 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번 최순실 정국을 수습하고 거국내각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행사하는 정당 또는 대권 주자가 차기 대선 정국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14일 박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돌연 제안하고, 국민의당과 시민사회가 이를 강력히 비판하자 곧바로 취소한 대목은 이런 야권 내부의 움직임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여당 지도부는 아직 청와대와 마찬가지로 여야 협의로 총리를 추천해 내치를 맡기는 방안에 여전히 무게를 두고 있다.

여야 협의로 총리를 추천한다는 것은 여전히 행정부의 인사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총리 추천을 포함한 거국내각 구성 과정에서 원내 제1당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차기 대선 지형을 완전히 불리한 구도로 전락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셈이다.

그러나 여권 내부의 상황 역시 야권 못지않게 복잡하다.

여권 주류인 친박(친박근혜)계 지도부는 퇴진 요구를 계속 거부하면서 '내년 1월 전당대회 카드'를 제시하고 당분간 정국 수습의 중심에 서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친박계의 이 같은 행보가 내년 1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과 무관치 않다는 설이 나돈다.

그러나 야권은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를 아예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새누리당 비주류 역시 친박계 퇴진을 요구하며 여권의 대표성을 회복하려 하는 등 여권의 주류가 소외되는 양상을 띤 점은 정국 수습을 위한 대화 채널의 가동을 더욱 더디게 만들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lesli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