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농부시인을 울린 포도밭의 기적
얼굴이 더 탔다. 땡볕에 그을린 정도가 아니라 까맣다. 마음고생이 오죽 심했을까. 수십년 가꾼 포도밭을 떠나야 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자주 밭에 나가고, 폭염 아래 포도알 매만지는 시간도 더 길었으리라.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서 유기농법으로 포도 농사를 지어 온 ‘농부 시인’ 류기봉 씨. 지난해 작고한 땅 주인의 유족이 포도밭을 처분하는 바람에 더 이상 경작할 수 없게 됐다. 포도밭이 없어지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은 19년째 이어 온 포도밭 예술제까지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42년 전 부친이 남의 땅을 빌려 개간한 산기슭 포도밭에서 대를 이어 포도를 키운 지 26년 만이다.

밭 팔리며 19년 된 예술제 중단

1990년 한국성서대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와 약속했다. 시인으로 등단할 때까지만 포도 농사를 짓겠다고. 3년 뒤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지만 포도밭을 떠날 수 없었다. 시 농사와 포도 농사를 동시에 짓기로 했다. 지렁이를 이용해 흙 성분을 바꾸고 자연퇴비로 땅심을 돋웠다. 당귀와 계피 감초를 발효시킨 ‘보약’에다 꽃필 무렵엔 바흐와 모차르트 음악까지 들려줬다. 흙 속의 미생물과 풀, 벌레가 함께 자랐다. 농약을 치지 않아 포도알은 작았다. 벌레 먹은 자국도 있고 봉지엔 곰팡이까지 폈다. 그래도 행복했다.

외환위기로 어수선하던 1998년 3월, 김춘수 시인이 넌지시 제안했다. “자네 포도밭에 시와 그림을 걸고 시낭송과 음악회를 해보면 어떤가. 프랑스에선 다들 포도밭에서 축제를 열던데….” 그렇게 첫 포도밭 예술제가 시작됐다. 포도 잎이 서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달빛 아래 햇포도주를 마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김춘수 시인은 7년을 시와 노래로 포도밭을 적시며 뿌듯해하다 2004년 작고했다. 떠나기 전엔 친필 원고 등을 주며 훗날 포도밭문화관을 만들 때 쓰라고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예술제 참가자가 300명을 넘었다. 시와 포도가 있는 ‘문화농장’이라며 좋아했다. 시인의 말마따나 밭에 있는 포도는 음식이지만 포도밭에 시와 그림, 음악이 있으면 문화다. 그런 예술제를 그만둬야 하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만하다.

딱한 사연에 후원 제안 잇달아

그런데 며칠 전 기적이 일어났다.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서로 돕겠다고 나섰다. 경북의 한 대학 이사장이 “고령 땅 11만평, 왜관 땅 1만평을 류 시인의 포도밭 농사와 예술제를 위해 제공하고 싶다”고 했고, 경기 안산시는 “포도 산지인 대부도를 중심으로 부지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경기 가평 운악산의 포도영농조합재단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검게 탄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포도밭 농사도, 예술제도 모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내일(3일) 열리는 19회 포도밭 예술제는 장현리의 마지막 행사이자 새로운 곳으로 출발하는 재탄생의 잔치다. 이번엔 김춘수 추모전에 초점을 맞춘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포도는 잎과 줄기가 다 나오고 난 뒤에 꽃을 피운다. 꽃 진 자리마다 눈물처럼 박히는 것이 포도알이다. 새 포도밭에서 알알이 여물 포도의 빛깔과 향기는 어떨지 벌써 기다려진다.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