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운업을 필두로 한 산업 구조조정 여파로 중·저 신용등급 기업의 회사채 발행 시장이 위축될 우려가 커지자 정부가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을 조기에 구원투수로 등판시켰다.

그간 정부는 산업은행을 동원한 회사채 시장 지원을 '컨틴전시 플랜(비상 계획)'으로 남겨둘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대책은 정부가 지금의 회사채 시장 상황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조선·해운 등 일부 기간산업의 부실화로 산업은행이 떠안은 부실자산 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나 자본적정성에 대한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시장이 외면하는 비우량 채권을 또 인수토록 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산업은행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의 채권은행이자 대주주로서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부실을 키웠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 산은 비우량 회사채 5천억 매입·1조4천억 규모 '신 P-CBO 프로그램' 도입

정부가 3일 내놓은 회사채 시장 안정화 대책의 초점은 신용등급이 BBB∼A인 비우량 회사채 발행 활성화에 맞춰졌다.

공모 회사채 발행잔액은 2008년 69조원에서 작년 말 151조원을 돌파하면서 7년간 2배 이상 증가했지만 저위험 채권에 편중돼 다양한 기업들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 시장에서는 AA 등급 이상의 우량 회사채만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했다.

동양, 웅진, 대우조선해양 등 A등급으로 분류되던 기업들이 잇따라 신용부도 사태를 일으킴에 따라 비우량 회사채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하락한 탓이다.

대형 기관 투자자들은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사고가 터져 큰 손실을 떠안을 수 있는 A등급 이하보다는 기대 수익이 조금 낮아도 안전한 AA 또는 AAA 등급 채권 보유를 선호한다.

2012년 말에 총 회사채 발행액 가운데 A 등급 이하 비중은 40.2%에 달했지만 작년 말에는 22.9%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앞으로 2년간 BBB~A 등급 회사채에 한해 최대 5천억원까지 산업은행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미매각분을 인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이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가 팔리지 않은 BBB~A 등급 회사채를 인수했다가 만기까지 보유하거나 다시 신용보강을 거쳐 유동화 증권으로 바꾸어 시장에 내놓는 방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이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시행되며 2017년까지 2년간 운영될 예정이다.

애초 검토 대상이 아니라던 산은의 미매각 회사채 매각 프로그램이 이번 대책에 포함된 것과 관련해 정부는 회사채 시장 안정화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상황이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형주 금융위 자본시장과장은 "당초 회사채 대책을 만들면서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춘 것이 사실이었다"며 "최근 기업 구조조정 지원 상황과 대외 여건 악화로 하반기에 중소·중견 기업의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져 컨틴전시 플랜을 일부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1조4천억원 규모의 신 P-CBO(유동화 보증) 프로그램 도입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대책이다.

새 프로그램에서는 신용보증기금 외에 산업은행과 증권사들이 함께 보증대상을 선정해 지원하고, 신보의 보증 대상은 중순위 채권으로 제한된다.

회사채 시장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보증 회사채는 지금까지 기업 신용만을 바탕으로 발행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중견·중소 기업은 자체 신용만으로는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 신용보증기금의 유동화 보증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왔다.

현재의 P-CBO 발행 지원 물량까지 고려하면 2018년까지 최대 4조원어치의 회사채 발행을 지원하게 되는 것이라고 금융위는 설명했다.

◇ 회사채 펀드 활성화로 기관 투자금 끌어들인다

비우량 회사채 수요 기반 확충 차원에서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기관이 회사채 펀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정비가 추진된다.

현재 우리나라 주요 기관은 개별 회사채에 직접 투자를 주로 하지 회사채 펀드에 투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부는 신용평가업계의 협조를 구해 앞으로 2년 동안 국내 주요 자산운용사의 대표 채권 펀드를 대상으로 무료로 신용평가를 하도록 했다.

가령 AAA 10%, AA 등급 회사채 80%, A 등급 회사 10%가 섞인 회사채 펀드가 신용평가사로부터 A 등급을 받았다고 하면 기관이 A등급 회사채에 투자하듯이 이 펀드에 대체투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 시장에서 외면받는 비우량 회사채 상당수가 회사채 펀드 편입 목적으로 소화될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연기금 등 주요 기관이 앞으로 일정 등급 이상의 신용평가를 받은 펀드를 편입할 수 있도록 업계 모범규준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 증권금융과 연기금투자풀이 비우량 채권을 포함한 회사채 펀드를 직접 구성해 운영토록 할 방침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엄연히 해당 기관의 자금은 국민연금 가입자, 보험 가입자, 펀드 투자자 등 민간의 것이라는 점에서 정부가 기관의 투자 방향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가 시장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투자는 각 기관이 수탁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며 "정책적 필요의 목적으로 특정 투자를 사실상 강요하는 것은 반시장적 행태"라고 말했다.

◇ 지재권 담보 회사채 발행 활성화…사모펀드에 기업 직접대출 허용

정책 자금을 동원한 직접적인 회사채 시장 지원 외에 제도 변화를 통한 시장 활성화 대책이 이번 발표 내용에 여럿 포함됐다.

우선 자체 신용만으로는 회사채를 발행하기 어려운 기업이 담보를 활용해 회사채를 원활하게 찍어낼 수 있도록 담보부사채신탁법 개정이 추진된다.

현행 담보부사채신탁법상으로는 부동산, 주식 등을 담보로 한 채권을 발행할 수는 있지만 매출 채권을 담보로 한 발행은 불가능했다.

당국은 앞으로 법을 개정해 매출 채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이다.

렌털 회사가 일정한 기간 단위의 계약을 통해 정수기, 공기청정기, 복사기 등을 고객에게 빌려주고 매달 청구하는 요금이 대표적인 매출 채권 중의 하나다.

현재도 매출 자산을 기초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자산유동화 증권을 찍어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 측면에서 매출 채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 발행을 허용하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생각이다.

아울러 지금껏 제도적으로는 가능했지만 유명무실했던 지적재산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 발행 활성화도 추진된다.

이를 위해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은 앞으로 1천억원 범위 내에서 지적재산권 회사채를 직접 사준다.

이 밖에 3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는 것을 포함하면 최대 1천300억원이 지적재산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 지원에 쓰이게 된다.

또 각종 담보를 바탕으로 한 회사채 발행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회수관리회사'가 도입된다.

회사채 투자자가 기한 안에 자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회수관리회사가 담보물을 처분해 일정 금액을 우선 투자자에게 돌려줄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우선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회수관리회사 역할을 맡게 되지만 민간 회사도 참여할 수 있다.

아울러 기업 자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차원에서 사모펀드가 회사에 직접 자금을 대출해 주는 것이 가능해진다.

현행 자본시장법에 사모펀드가 기업에 자금을 직접 빌려주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각종 하위 규정에 따라 사실상 불가능했다.

금융당국은 '대출형 사모펀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앞으로 세부 지침을 만들어 사모펀드가 기업 금융 업무에 나설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해외 사례로는 미국에서 '오크트리' '아폴로글로벌' 등 다양한 대출형 사모펀드가 운용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은행의 유동성 규제가 강화된 이후 이런 펀드가 급성장하는 추세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ch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