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보이지가 누드를 버린 이유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플레이보이 맨션’에 한 남성이 들어갔다(플레이보이 맨션은 미국의 대표적 성인잡지 플레이보이를 창간한 휴 헤프너 발행인의 대저택을 지칭한다). 헤프너를 만날 참이었다. 이 남성은 코리 존스 플레이보이 수석편집자였다. 존스는 “잡지에서 누드를 없애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미국 성(性)문화의 아이콘이 된 헤프너는 망설였지만 결국 존스의 뜻을 받아들였다.

플레이보이가 누드를 포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마릴린 먼로 등 세계적인 스타들의 누드 사진을 내세워 성공한 성인잡지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62년 만에 버리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유는 인터넷 때문이다. 차고 넘치는 누드 사진은 물론 동영상 음란물이 클릭 하나로 수백개씩 펼쳐지는 세상이다. 최고 전성기였던 1975년 플레이보이는 한 해 560만부가 팔렸다. 그러나 지금은 80만부밖에는 팔리지 않는다.

메릴린 먼로의 사진을 실은 1953년 플레이보이 표지.
메릴린 먼로의 사진을 실은 1953년 플레이보이 표지.
누드는 플레이보이를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헤프너가 애착을 갖고 애지중지 키워온 ‘사업’이었다. 그만큼 이번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역설은 누드를 포기해야 열리는 시장이 있다는 것이다. 플레이보이 웹사이트는 작년 8월부터 누드 사진을 걸지 않고 있다. 대신 젊은 층이 선호할 만한 글이나 동영상을 내세워 클릭을 유도한다. 그랬더니 웹사이트 방문자 평균 연령이 47세에서 30대 초반으로 뚝 떨어졌다. 월간 방문자 수는 400만명에서 1600만명가량으로 급증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기업일수록 기업의 상징이 된 ‘애착 사업’을 버리기 어렵다. 창업주의 후손은 물론,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도 이런저런 애환이 묻어 있어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끌어안고 가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론 플레이보이처럼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 백색가전은 회사를 키운 효자였다. 하지만 성장의 한계를 느끼자 지난해 100년 전통의 백색가전을 스웨덴 일렉트로룩스에 팔았다. GE의 성장을 견인해온 금융부문도 전부 내다 팔기로 했다.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은 아예 제조업 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겠다고 밝혔다.

미국 시어스백화점은 원래 시계 통신판매업체였다. 1886년 설립 후 20세기 초까지 통신판매로 돈을 많이 벌었다.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고 농촌 지역까지 도로가 뚫리자 통신판매업체에서 교외에 거대한 주차장이 딸린 대형백화점으로 업태를 바꿔 지금에 이르렀다. IBM은 한때 세계 최고의 컴퓨터 제조업체였지만 회사를 키운 1, 2대 CEO 토머스 J 왓슨 부자(父子)의 유산을 버리고 1990년대에 기업 컨설팅을 하는 정보기술(IT) 서비스 회사로 탈바꿈했다. 노키아는 원래 장화를 생산하는 회사였고, 듀폰은 화약을 제조하는 업체였다.

고(故)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의 토대가 된 건설업에만 집착해 될지 안 될지 불확실한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를 누비는 현대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업의 ‘핵심 가치’를 지키겠다면서 실제론 기업의 ‘애착 사업’을 지키는 CEO들이 많다. 몇 번이고 변신하겠다는 의지 없이 장수기업이 되는 길은 없다.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