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KT가 다시 한 번 열심히 할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쏟아지는 비난에 황창규 KT 회장은 굳이 변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변화할 테니 지켜봐 달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 힘있게 강조했다. 악화된 경영 상태를 신랄하게 지적한 한 주주에게는 “기대에 부응하고 그 이상의 결과를 내겠다”고 안심시켰다. 지난 3월21일 서울 우면동 KT연구개발센터에서 열린 KT 제32기 정기주주총회에 의장으로 나섰던 황 회장의 모습이다.

그로부터 보름 남짓이 지난 시점, KT는 사상 최대 규모의 특별명예퇴직 시행을 발표했다. 조직개편과 임원 인사에 이은 빠른 행보였다. 지난 6일로 취임 100일을 맞은 황 회장은 잇따르는 악재 속에서도 약속한 변화가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굵직한 개혁을 잇달아 추진하고 있다. 공룡 KT의 체질을 바꾸기 위한 ‘구원투수’로 등판한 황 회장. 그의 승부사 기질에 발동이 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취임 70일 만에 8300여명 명퇴 단행

황 회장이 KT 최고경영자(CEO)로 공식 취임한 것은 올 1월27일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내정 발표가 난 지난해 12월16일부터 시작했다. 황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1등 KT’ 비전을 제시하고 ‘도전·소통·융합’의 경영 철학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황창규호(號)’가 닻을 제대로 올리기도 전에 악재가 잇따랐다. 황 회장 취임 직후 KT는 지난해 말 기준 당기순손실이 603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창사 이래 최초 적자 기록이었다. 계열사인 KT ENS 직원이 연루된 사기 대출 사건도 발목을 잡았다. 지난 3월6일에는 해킹으로 12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KT가 연달아 난관에 봉착하며 황 회장의 리더십은 취임하자마자 시험대에 오른 형국이 됐다.

황 회장이 선택한 것은 ‘책임경영’을 기치로 내건 정공법. 해킹 사건 이튿날인 7일 황 회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대국민 사과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취임 이후 언론과 첫 대면하는 자리가 사과 회견이었던 것은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당기순이익 적자 ‘어닝 쇼크’도 황 회장 본인의 기본급 30%를 반납하고, 회복 기미가 보일 때까지 장기성과급도 반납하는 방식으로 솔선수범에 나섰다.

체질 개선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취임 당일 오후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단행, 전체 임원의 27%를 축소하고 지원부서의 임원급 직책을 50% 줄였다. 현장 인력은 보강해 영업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달 8일에는 근속 15년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명예퇴직 시행을 발표해 KT 사상 최대 규모인 8300여명의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명퇴 규모가 큰 만큼 신청 기간 내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황 회장은 명퇴 신청이 끝난 지난달 24일 전 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이번 명예퇴직으로 수십년간 회사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떠나게 돼 KT의 수장으로서 가슴 아프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퇴직하시는 분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힘내어 일어나자”고 다독였다. 그는 “미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은 버리고 1등 KT가 되도록 다 같이 최선을 다하자”고 임직원들을 설득했다.

공대 출신 엘리트 경영인

황 회장은 공대 출신 경영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부산에서 1953년 태어난 그는 부산고를 졸업해 서울대 전기공학 학·석사를 마쳤다. 이후 반도체 엔지니어의 꿈을 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 책임연구원 시절에는 미국 인텔사 자문을 겸하며 의욕적으로 연구에 매진해 다수의 연구 업적을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에는 학계가 아닌 업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성과를 쌓아나갔다. 1994년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한 데 이어 삼성전자 사장 시절인 2002년에는 1년에 메모리 반도체 용량이 2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꼼꼼하면서도 추진력 있는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황의 법칙은 간결한 내용이지만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공정과 프로세스별 연구 진척 과정을 샅샅이 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추상적 의지 강조보다 구체적 목표 설정과 달성을 중시하는 황 회장은 당시 임직원들에게도 세부적인 성과 기준을 정해 놓고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KT에서도 이 같은 리더십이 조직 개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위성 사업부터 부동산, 미디어 등 다방면에 걸쳐 계열사를 갖고 있는 KT의 산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숲 전체를 보면서도 나무 한 그루씩 잘라내는’ 황 회장식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인관계 좋고 다재다능

이력만 보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지만 황 회장은 클래식 음악·미술·서예 등 다방면에 소질이 많다. 그의 조부는 사군자 가운데 매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구한말 화원화가 황매산 선생이다. 테니스와 골프 실력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인관계도 폭넓다. 애플 휴렛팩커드(HP) 인텔과 같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CEO와 긴밀한 사이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지식경제부 장관 시절 황 회장이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장을 맡은 인연으로 친하고,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는 동향(부산)으로 긴밀한 사이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경부 R&D전략기획단 초대 단장을 거친 만큼 정부의 정보통신기술(ICT) 정책에 대한 이해도 높다. 황 회장이 뚝심있게 밀어붙여도 ‘외골수’ 평가를 안 받는 데는 이 같은 배경이 한몫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그가 전사 임직원에게 내린 지시는 “모든 의사 결정과 실행을 할 때 부서 간의 벽을 타파하라”는 것이다. 황 회장은 “부서는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부서이기주의가 있다면 그 벽과 함께 책임자도 부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새로운 슬로건인 ‘싱글 KT’에 담긴 의미다.

KT와 각 계열사가 황창규 선장의 지시 아래 순항에 힘을 모을지 업계에서는 기대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황창규 회장 프로필

△1953년 부산 출생 △부산고 △서울대 전기공학 학사(1976) △서울대 대학원 전기공학 석사(1978)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전자공학 박사(1985)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2004)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2008)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팀 단장(2010) △성균관대 석좌교수(2013) △KT 회장(2014)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