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경영상] LTE 전국망 승부…'1등 DNA' 심어 위기 돌파
2011년 6월30일 오후 11시59분 서울 상암동 LG유플러스 네트워크센터 종합관제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을 비롯한 50여명의 임직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드디어 7월1일 0시. 이 부회장이 버튼을 눌렀다. 4세대 이동통신 LTE의 첫 전파가 발사됐다. 관제실 전광판에 서울과 광주, 부산으로 이어지는 전파 물결이 그려졌다. LG유플러스의 기업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부회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임직원에게 말했다. “여러분, 봄이 언제 오는지 아십니까? 봄은 꽃 한 송이를 따라옵니다. 화발천산공득춘(花發千山共得春)이라 했습니다. 꽃이 한 송이 피면 1000개의 산이 함께 봄을 맞는다는 말입니다.” LTE의 첫 전파가 꽃 한 송이며, LG유플러스의 앞날에 봄이 만개할 것이란 의미였다.

이 순간이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첫 전파를 쏘기까지 힘겨운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2010년 1월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등 LG의 통신 계열사 세 개를 통합해 세운 LG유플러스의 첫 CEO(최고경영자·부회장)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LG유플러스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 스마트폰이 도입됐으나 LG유플러스는 이를 판매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 LG유플러스는 스마트폰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입자가 줄고 매출과 투자가 감소하며 브랜드 이미지가 나빠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 임직원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 부회장은 LTE에 승부수를 던졌다.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LTE 서비스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생존할 수 없다”며 임직원을 독려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각오로 임한 덕분에 LG유플러스는 단 9개월 만에 LTE 전국망을 구축했다. 국내 통신사 가운데 처음으로 LTE 전국망 서비스를 시작했다. LTE 서비스 개시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떠났던 가입자들이 돌아오자 매출이 늘었다. 브랜드 인지도도 높아졌다. 이 부회장의 승부수가 통한 것이다. 이 부회장은 공을 임직원에게 돌렸다. “2010년과 2011년 LG유플러스에서 단 한 명의 직원도 보너스를 받지 못했다. 연봉도 동결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한마음으로 따라왔다. 덕분에 방황하지 않고 긴 터널을 헤쳐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버티고 따라와준 직원들이 제일 고맙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새로운 물길이 계속 열리고 있다. 통신 3사 가운데 SK텔레콤 KT에 이어 만년 꼴찌였던 LG유플러스는 LTE시장에서 KT를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새로운 서비스를 먼저 내놓는 등 또 다른 반전도 꾀하고 있다. 올해 1월 가장 먼저 데이터를 무제한 제공하는 요금제를 내놨다. 이어 4월 음성통화뿐 아니라 문자메시지와 데이터도 무제한 제공하는 요금제를 선보였다. 보조금 중심의 통신시장 경쟁 패러다임을 서비스 중심으로 바꿔나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다.

번호이동(가입자가 통신사를 바꾸는 것) 시장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지난해 8월 말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 LG유플러스가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한 지 15년여 만이다. 이 부회장은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1등 정신, 1등 스피릿(spirit)’을 강조해왔다. 3위에 안주하지 말고 앞서가는 경쟁력을 키우라는 의미에서다. 이런 그의 경영철학이 LG유플러스를 바꿔놓았다는 분석이다.

이 부회장이 LG유플러스에 ‘1등 유전자’를 심은 것은 그의 인생 행로와 연관이 있다. 그는 평생 새로 만드는 것에 꽂혀 살았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에는 언제나 ‘차세대’ ‘최초’ ‘첫’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정보통신부 장관 재임 시절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 와이브로 등의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KT에선 통신망연구소와 무선사업본부를 처음 만들어 초대 소장과 초대 본부장을 지냈다. KTF 첫 사장, 통합법인 LG유플러스의 첫 CEO 등 그의 직함도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이 늘 남들이 가지 않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사고’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쉴 틈 없이 생각한다”며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고 강조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

■ 이상철 부회장은 …

통신업계 역사의 산증인, LG유플러스 첫 CEO 맡아…장애 청소년에 ICT 지원도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은 ‘통신업계의 역사’ ‘통신통(通)’으로 불린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원, KTF·KT 대표이사, 정보통신부 장관, 광운대 총장 등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민·관·학을 두루 거쳤기 때문이다.

경기고,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나 버지니아 폴리테크닉주립대에서 공학 석사, 듀크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KTF 대표이사에 올라 6개월간 12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 최단 기간 최다 가입자를 끌어모으는 기록을 세웠다. 2001년 KT 대표이사에 취임해 민영화를 주도했다.

정통부 장관 시절엔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과 와이브로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또 번호이동제도를 도입해 통신업계 경쟁을 촉진했다. ‘최고경영자(CEO) 총장론’을 내세워 광운대를 ICT 특성화 대학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2010년 초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등 LG의 통신 계열사 세 개를 통합해 세운 LG유플러스의 첫 CEO(부회장)로 취임했다. 이후 국내 통신업체 가운데 처음으로 4세대 이동통신인 LTE 서비스를 시작해 통신 3사 중 만년 꼴찌였던 LG유플러스를 LTE 시장 2위로 끌어올렸다. 지난 4월 국내 통신산업을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통신학회가 주관한 ‘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에서 정보통신대상을 받았다.

한국장애인재활협회 회장으로 장애 청소년들이 ICT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과 이상문 네브라스카대 경영학과 교수가 친형들이다. 부인 한명희 씨(사단법인 한국우리누리재단 이사장)와 1남1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