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의 오랑우탄 제니가 사육사에게 안겨 삼성전자 85인치 UHD TV에 비친 바나나 화면에 다가가고 있다. 이 제품은 거대한 프레임 안에 화면이 떠 있는 듯한 독특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제공
에버랜드의 오랑우탄 제니가 사육사에게 안겨 삼성전자 85인치 UHD TV에 비친 바나나 화면에 다가가고 있다. 이 제품은 거대한 프레임 안에 화면이 떠 있는 듯한 독특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삼성전자 제공
일본 대형 가전양판점인 비쿠카메라의 도쿄 유라쿠초 매장. 2층 TV코너에 들어서자마자 검은색 대형 현수막이 눈길을 잡았다. “TV의 신시대 도래! 4K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4K는 최근 일본 전자업체들이 잇달아 출시한 초고화질(UHD) TV의 별칭. 가격표를 살피는데 어느새 매장 직원이 옆에 붙었다. “한 달에 1만엔(약 11만4000원) 정도면 바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TV 가격표 왼쪽에 부착된 빨간 글씨의 선전문구를 가리켰다. “50개월 할부행사! 이자와 수수료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UHD TV 가격은 60만~80만엔(약 680만~910만원) 수준으로 일반 평면TV보다 5~6배는 비쌌다. 한쪽에 진열된 도시바의 84인치짜리는 168만엔(약 1910만원)에 달했다. 얼마나 팔릴까 싶었다. TV매장 직원인 무라타의 대답엔 웃음기가 돌았다. “한 달에 40대 정도는 꾸준히 나갑니다. 재작년 겨울 스마트폰에 빼앗겼던 1층 명당 자리를 TV가 다시 차지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2020년까지 세계 UHD TV 시장이 연평균 47%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TV 제조·방송 업체들은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UHD TV 시장에서 특히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곳은 일본이다.

◆일 “UHD TV로 삼성에 설욕”

소니의 반격…삼성에 뺏긴 'TV 패권' UHD로 탈환 나서
10여년 전만 해도 ‘TV는 곧 소니’라는 등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디지털TV가 등장하면서 일본은 TV 시장의 패권을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넘겨줬다. 브라운관에서 디지털TV로 전환하던 시기에 안일하게 대응했던 탓이다. 한국 기업은 TV 시장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첨단 디지털 기술력으로 치고 나왔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디지털 대신 ‘아날로그 HD’를 주장하며 일본 독자 방식의 방송규격을 만들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또 삼성과 LG가 액정표시장치(LCD) 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동안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은 PDP를 붙잡고 매달린 것도 한국 기업에 추월당한 이유가 됐다. 거기다 일본 내수 경기가 침체되는 등 악재가 겹쳐 소니는 TV사업부문에서 9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면서 총 손실 규모가 7620억엔에 달했다.

일본은 한국 시장에 뺏긴 ‘TV 패권’을 UHD TV를 통해 다시 찾아오겠다는 전략이다. 일단 일본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다. 올 들어 일본 전자업체들이 앞다퉈 ‘보급형’ 신제품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됐다. 일본 가전업체들이 ‘인치당 1만엔’이라는 목표를 걸고 가격 인하 경쟁에 나선 것이 기폭제였다.

소니는 지난해 말 84인치 UHD TV를 출시한 데 이어 올해는 연이어 55·65인치 보급형 UHD TV 신제품을 내놨다. 특히 이번에 출시한 55인치 TV의 가격은 지난해 내놓은 84인치 제품의 30% 수준이다. 도시바와 샤프 등도 50인치대, 60인치대 등 다양한 크기의 UHD TV를 내놓을 예정이다.

꽁꽁 얼었던 소비자의 마음도 풀리기 시작했다. 가전시장 조사회사인 BCN에 따르면 지난 6월 전체 TV 판매량 중 40인치 이상 대형 제품이 차지한 비중이 처음으로 30%를 넘어섰다. 1년 전(25%)보다는 5%포인트 높아졌다. 판매된 TV의 평균 크기도 사상 최대인 32.8인치를 기록했다. UHD TV의 선전이 전체 TV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가전양판점마다 4K TV에 대한 문의가 급증하고 있다”며 “초기에 대형 평면TV를 샀던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가 슬슬 4K TV로 갈아타기 시작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일본 정부도 발벗고 나서

일본 정부도 적극적이다. 일본은 2000년부터 공영방송사 NHK 주도로 UHD 시장 개척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당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으로 잡았던 UHD 방송 도입 시기를 최근 ‘2014년 브라질 월드컵’으로 2년 앞당겨 세계 방송업계를 긴장시켰다. 2015년 하반기 UHD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보다 1년가량 빠른 시점이다. 일본은 2016년께 풀HD 해상도의 8배에 달하는 8K UHD TV 시험 방송도 할 계획이다.

NHK는 작년 5월 세계 최초로 UHD 공중파 시험방송을 마쳤다. 최근엔 2020년까지 일본 전역에 UHD 방송을 내보낸다는 단계별 로드맵도 마련했다. 총무성에 따르면 일본은 내년까지 셋톱박스 등을 통해 희망하는 시청자가 집에서 시청 가능한 환경 정비를 목표로 UHD 방송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IPTV의 VOD 서비스도 내년 초 시범적으로 개시하기로 했다. 2016년까지는 8K를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을 정비하고,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에는 원하는 시청자가 TV로 4K와 8K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 4월엔 UHD 방송을 위한 고화질 영상처리 기술 등을 개발하기 위해 20여개 일본 전자업체와 공동 연구개발 조직도 꾸렸다.

◆중국 업체도 반격 중

한국을 추격하고 있는 건 일본뿐만이 아니다. TCL 하이얼 하이센스 스카이워스 등 중국 TV제조사들도 이에 뒤질세라 값싼 UHD TV를 쏟아내는 등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 제품의 품질은 떨어지지만 가격 경쟁력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당해낼 수 없다는 평가다. TCL은 55인치 UHD TV를 1600달러(약 174만원)라는 파격가에 선보였다. 삼성전자의 같은 크기 제품(640만원)의 4분의 1 가격이다. 중국 TV제조사인 스카이워스도 3차원(3D) 영상까지 지원하는 50인치 UHD TV를 약 160만원에 판매 중이다. 허남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방송시스템연구부장은 “일본 중국 등의 추격세가 무섭다”며 “국내서도 UHD 콘텐츠 활성화 등을 위해 정부에서 장비를 싼값에 대여해주는 등 인프라와 인재를 키워내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