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맥아더와 팔미도 등대
6·25가 터진 지 80여일. 낙동강 방어선을 제외한 전 국토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천으로 상륙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극구 반대하던 미국 합동참모본부 장성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은 전쟁 발발 4일째 한강 방어선을 시찰할 때였다. 그러나 미 해군은 조수 간만의 차가 너무 크고 접안지역이 좁은 데다 시가전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지형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작전 성공률이 5000 대 1밖에 안 된다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그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것이라며 이들을 설득해 8월28일 최종 승인을 얻었다.

D데이를 9월15일로 잡은 것은 이날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작았기 때문이다. 인천으로 상륙하려면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했는데, 그 섬 바로 앞에 팔미도가 있었다. 팔미도는 작은 섬이지만 전략적 요충지였다. 더구나 야간 상륙작전에는 함대를 유도하는 등대 불빛이 필요했다.

켈로부대(대북첩보부대) 최정예 멤버 6명에게 “15일 0시를 기해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9월14일 저녁 소음총으로 무장하고 팔미도로 잠입했다. 섬을 지키던 인민군을 해치운 뒤 등대를 점령한 시각은 밤 11시30분. 그런데 등대의 점등장치 밸브가 빠져 불을 붙일 수 없는 게 아닌가. 어둠 속에서 시간은 자꾸 가고, 밸브를 찾는 대원들의 숨소리는 더욱 가빠졌다. 급기야 넋나간 모습으로 바닥에 드러누워버린 한 대원의 손에 뭔가가 걸렸다. 밸브였다. 천신만고 끝에 등대에 불을 밝힌 것은 오전 1시45분. 정해진 시각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늦었다.

그때까지 마운트 매킨리 호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발진명령을 내렸다. 함정 260여척, 병력 7만여명을 동원한 인천상륙작전은 팔미도 등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지쳐 쓰러졌던 대원들은 날이 밝은 뒤 배에 올랐다. 맥아더는 이들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며 공적을 치하했다. 이날 작전은 서울을 수복할 길을 확보하면서 공산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끊음으로써 전세를 완전히 뒤바꾼 것이었다.

이런 엄청난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팔미도 등대는 110년 전인 1903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다. 해발 71m의 팔미도 꼭대기에서 석유등으로 주변 10㎞ 해상을 비추던 이 등대가 곧 국가현충시설로 등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63년 전 그날 역사적인 불빛으로 혁혁한 무공을 세운 그에게 국가가 뒤늦게 주는 훈장인 셈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