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안팎을 한결같이 정진해 샐러리맨으로서 꿈을 이뤘던 삼성그룹 최고경영자(CEO)들.이들이 퇴임 후에 맞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22일 경제계에 따르면 2009년 초 CEO에서 물러난 배정충 전 삼성생명 부회장,이용순 전 삼성정밀화학 사장,고홍식 전 삼성토탈 사장과 작년 말 퇴임한 김징완 전 삼성중공업 부회장 등은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석사과정 등록을 마치고 다음 달부터 대학원생으로 학교를 다닌다. 이창렬 삼성사회봉사단 사장도 같은 대학원에 등록을 마쳤다. 박노빈 전 에버랜드 사장,송용로 전 삼성코닝 사장,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이중구 전 삼성테크윈 사장이 작년 3월부터 이미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올해 총 9명의 삼성 CEO 출신들이 유학 공부를 하게 되는 셈이다.

글로벌 비즈니스의 최전선을 누비던 삼성의 전직 CEO들이 다시 학교를 찾는 이유는 뭘까.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유학의 가르침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서라는 게 CEO들의 설명이다.

김 전 부회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평소 동양 고전에 관심이 많았지만 회사 경영을 할 때는 시간이 없었다"며 "유학은 한국인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고전 공부를 하며 삶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고민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수십년간 직장 생활을 함께했던 선후배 동료들과 계속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유학대학원 진학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덧붙였다.

김 전 부회장은 경영 · 경제학이나 공학 전공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삼성 CEO들과 달리 대학(고려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삼성중공업 CEO로 재직할 때 "리더십과 조직의 흥망성쇠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교재"라며 임직원들에게 역사책 읽기를 권하기도 했다.

삼성 CEO들이 등록한 유학대학원은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역경 등 고전을 강독하면서 유교 철학사를 가르친다. 도가철학,불교철학,서양철학 등 다른 철학 사조들과 유학을 비교 · 분석하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철학 사상의 흐름도 강의한다. 물론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선 각자 전문 분야를 선택해 논문을 써야 한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관계자는 "삼성 CEO 출신들은 출석률이 높고 학습에도 강한 열정을 보이고 있다"며 "연륜과 경험이 다양한 분들이 많아 대학원의 대외 이미지도 많이 좋아졌다"고 전했다.

한편 삼성 CEO 중엔 자신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퇴임 후 새로운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애니콜 신화'를 이룩한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우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소 교수로 변신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이끈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공직(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에 들어가 국내 연구 · 개발(R&D) 기반을 확충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한 한용외 전 삼성전자 사장처럼 봉사 활동에서 보람을 찾는 이들도 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