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재판 피고인 10여년만에 절반이하 감소

우리나라 형사소송의 역사는 일본강점기에 관행으로 굳어진 조서중심의 재판에서 탈피해 공판중심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13일 법원행정처가 사법부 출범 6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역사속의 사법부'에 따르면, 수사기록인 조서 중심의 형사재판 관행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판사가 일본말로 재판을 진행하면서 비롯됐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탓에 재판은 자연스럽게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공판'보다는 수사기록인 '조서' 중심으로 흘러가게 됐다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 조선인에게 적용되던 형사사건 법규인 조선형사령은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일본의 예심판사가 작성한 조서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해 조서에 대한 재판의 의존도를 더욱 높이는 역할을 했다.

검사가 공소제기와 함께 사건기록 일체를 법원에 제출하면 판사는 재판 전에 수사기록을 미리 읽어보고 유ㆍ무죄 판단과 함께 형을 정한 뒤 재판에 임했다.

그러다 보니 재판은 수사기록이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는데 그쳤다.

조선형사령은 해방 후 미군정 초기까지 적용되다 1948년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정부법령'을 시행하면서 폐지됐다.

이때 비로소 검사나 경찰이 작성한 조서를 곧바로 유죄의 증거로 인정하던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조서 중심의 재판 관행은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후까지 이어졌고, 1982년 형사소송규칙 제정으로 '공소장일본주의'를 도입하면서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됐다.

공소장일본주의는 판사가 사건을 예단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다른 자료나 증거물을 배제한 채 공소장만을 법원에 제출하도록 한 규정이다.

1996년에는 형사소송규칙 개정으로 검사가 증거를 특정해 개별적으로 제출하도록 증거신청절차가 개선됐지만 이러한 규정들은 여전히 잘 지켜지지 않았다.

판사들이 맡은 사건이 많고 심리 시간이 짧은 것도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2002년 형사재판부를 대폭 증설하고 공판을 자주 열게 하는 등 법정 심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뒤따랐다.

즉결심판이나 약식명령을 활성화해 법관이 주요 사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판 부담을 덜어주려는 노력도 병행됐다.

이 무렵 피고인에 의한 반대신문이 없는 참고인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등 공판중심주의를 뒷받침하는 대법원 판례들도 잇따랐다.

그러다 2007년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형사재판의 제도적 틀을 갖추게 됐다.

공판기일 전에 피고인 측이 검사의 수사기록을 미리 볼 수 있게 하는 '증거개시제도'도 이때 도입됐다.

이와 함께 영장실질심사제도가 확대되고 불구속재판 원칙의 확립됐으며, 형사보상, 무죄판결공시, 재정신청 등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 개선도 이뤄졌다.

덕분에 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는 피고인 수는 1996년 10만9천900명에 달하던 것이 2007년에는 절반도 안되는 4만2천100명으로 급감했다.

2008년 국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직접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되면서 공판중심주의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abullapi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