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남편도 피해자 될 수 있어

부산지법이 흉기로 위협해 부인을 성폭행한 40대에 대해 16일 처음으로 강간죄를 인정해 한동안 잠잠하던 '부부 강간죄'에 대한 각계의 논란이 재점화될 전망이다.

1970년 대법원이 부부간 강간죄 성립을 부정한 이후 그동안 하급심에서조차 이를 인정한 사례는 없었다.

1977년 서울고등법원이 강간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당사자들은 정식 부부가 아니라 사실혼 관계였다.

또 2004년 서울중앙지법이 이혼 위기에 있는 부인을 성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한 적은 있지만, 강간죄 적용은 이번이 처음이다.

L(42) 씨의 혐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규정한 특수강간으로 법정형은 징역 5년 이상이다.

일반 형법의 강간은 3년 이상, 강제추행은 10년 이하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형을 받게 되지만 L씨에게는 특별법이 적용됐으며 감형 사유가 있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쟁점 = 그동안 부부 사이에 강간죄가 성립하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현행법상 강간죄의 대상은 '부녀', 즉 여성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혼인 중인 부녀'가 이에 포함되느냐 하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논란거리였다.

또 민법은 부부 사이에는 동거의 의무, 즉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부부간 성관계를 '의무'로 보고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부부라는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한 문제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있다.

이에 대해 부산지법 형사5부(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는 "형법상 '부녀'에 '혼인 중인 부녀'가 제외될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별도 법률을 만들지 않더라도 이를 처벌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또 동거의 의무가 있지만, 이 때문에 부인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거나 그런 권리가 상실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이번 재판부의 입장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포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일 때 매번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강간죄를 만들어 보호하려는 것은 '정조'가 아니라 인격권에 해당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인 만큼 이를 보호할 의무도 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이런 요구가 무시될 때는 강제로 성관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설득을 해야 하고 최종적으로는 동거의 의무 불이행을 전제로 이혼을 청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재판부는 "잘못된 방법으로 아내를 강간하는 것은 상대를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충족과 의사관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위며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이라며 "부부간 강간죄를 묻지 않는 것은 개인과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의 취지와도 맞지 않으며 권리의식이 보편화한 문명시대에 통용될 수 없다"라고 밝혔다.

◇ 부인이 남편을 성폭행하면 = 1967년 대법원은 형법 297조의 강간 범행의 대상을 '부녀'로 한정한 것에 대한 위헌심사에서 사회적·도덕적 견해로 볼 때 피해자인 부녀를 보호하려는 법인 만큼 피해자를 부녀로 한정한 것은 남성에게 불이익을 주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따라서 형법이 강간죄의 객체를 여성으로 한정하는 한 부인이 남편을 강제로 성폭행했더라도 강간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독일은 1997년 부부 강간죄를 부정하는 근거가 됐던 '혼인 외의 성교'라는 부분을 삭제하고 나아가 '여성'(eine Frau)으로 한정한 피해자를 '타인'(eine andere Person)으로 대체함으로써 남자도 부부 강간의 피해자가 될 수 있게 했다.

◇ 악용 될 소지 없나? = 부부간 강간죄가 인정되면 이를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이 사건 재판부도 이혼을 하려고 악용하거나 감정적인 보복을 위해 또는 재산분할을 위해 고소를 남발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는 데서 많은 고민을 했다.

부산지법 박주영 공보판사는 "구체적인 사건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했을 때 수사와 재판 등 형사 사법절차에 따라 그 시비를 가려야 할 것"이라며 "이런 우려 때문에 부부간 강간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논거가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 다른 나라에서는 = 영국과 미국은 오랜 기간 부부 단일체 이론을 내세워 부부간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봐 왔다.

그러다 1984년 미국 뉴욕주 항소법원이 '혼인증명서가 부인 강간에 대해 면책받는 자격증이 아니다'며 며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했다.

영국도 1991년 부부 강간죄의 면책 조항을 폐기했으며, 독일은 1997년 강간죄의 객체를 아예 '여성'에서 '타인'으로 바꿈으로써 남편까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있게 했다.

프랑스도 1981년부터 '폭력, 강요, 협박, 충격적인 방법 등을 이용해 타인에게 가하는 모든 형태의 성적 삽입행위'로 강간죄를 규정함으로써 부부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은 부부간 혼인관계에 실질적인 파탄이 없는 한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국제연합(UN)은 1993년 제48차 총회에서 부인 강간을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일례로 제시했으며, UN 인권위원회는 1999년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의 부인 강간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부산연합뉴스) 박창수 기자 pc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