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팀 = 통화 당국이 전방위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은행권에 단기자금이 넘쳐나고 있지만, 중소기업 등 실물부문의 자금경색은 지속되고 있다.

9월 중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신청 이후로 지금까지 한은이 공급한 자금은 무려 20조 원에 달한다.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으로 13조 5천억 원, 통화안정증권 중도 환매로 7천억 원, 총액한도대출 증액으로 1조 7천억 원, 국고채 직매입으로 1조 원 등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들 자금이 실물 부문에 전달되지 않고 다시 한은으로 `역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윳돈'이 한은과 은행 사이만을 오가면서 제2금융권의 자금난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관리를 위해 중소기업 대출을 꺼리고 있고 회사채나 기업어음(CP) 금리가 고공행진을 지속하면서 기업의 자금 사정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 기업들 "풀린 돈 다 어디로 갔나요?"
2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11월 예금은행의 기업대출 증가액은 3조 5천억 원으로 10월 7조 3천억 원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하면서 올해 들어 최저 수준에 머물렀다.

이달 들어서도 18일까지 국민, 우리, 신한, 하나은행 등 4개 시중은행의 기업대출 증가액은 1조 8천596억 원으로 지난달 한 달간의 1조 9천733억 원과 비슷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대기업 대출은 늘었으나 상대적으로 대출리스크가 큰 중소기업 대출은 지난달 1조 8천714억 원에서 이달 1~18일 1천489억 원으로 급격히 줄었다.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조달도 쉽지 않다.

기업공개와 유상증자 등의 주식 발행을 통한 기업들의 자금조달 규모도 11월에 2천430억 원으로 전달보다 21.4% 감소했다.

자금조달 길이 막힌 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으로 몰려가면서 기업들이 회사채 공모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은 지난달 3조 5천162억 원으로 전달의 2조 2천539억 원보다 56.0% 급증했다.

무엇보다 높은 금리가 부담이다.

기준금리가 10월 이후로 2.25%포인트 떨어졌는데 3년 만기 회사채(AA-등급) 금리는 10월초 7.87%에서 지난 19일 7.98%로 올랐다.

91일 물 CP 금리도 6.72%에서 6.79%로 상승했다.

물론 회사채 금리는 지난달 28일 기록한 고점 8.91%에 비해 다소 내려왔고 CP 금리도 11월 초 7.39%보다 낮아졌지만, 기준금리 인하 폭에는 절반에도 채 못 미친다.

◇ 한은-은행, 맴도는 단기자금
막대한 유동성 공급으로 단기자금은 넘쳐나고 있다.

지난주 실시된 한국은행의 8일 물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입찰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41조 2천700억 원이 응찰했다.

한은은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자금운용을 유도하기 위해 3분의 1인 13조 원만 흡수했다.

앞서 10월 30일 RP 입찰에서도 17조 5천억 원이 응찰했다.

RP 매각은 일정 기간 이후에 다시 되사는 조건으로 한은이 채권을 매각하고 시중의 자금을 흡수하는 방식이다.

RP 금리는 기준금리인 연 3%에 불과하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기준금리 수준에서라도 약 41조 원의 자금을 한은에 예치하려 했다는 의미다.

나머지 자금들은 하루짜리 콜시장으로 몰리게 된다.

이에 따라 콜금리는 17일과 18일 모두 2.81%로 기준금리보다 약 0.20%포인트 낮게 거래되고 있다.

콜시장에서조차 운용처를 찾지 못한 자금들은 현재 2% 금리에 불과한 한은의 자금조정예금(은행들이 한은에 맡기는 하루짜리 단기예금)으로 유입된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들어 자금조정예금이 계속 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자금이 `핑퐁게임'처럼 고스란히 한은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얘기다.

◇ 2금융권 자금기근 지속
시중에 공급된 자금이 은행권에만 머물면서 제2금융권도 자금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은이 지난주 기준금리를 1%포인트 인하한 뒤 시중은행들이 예금금리를 잇달아 낮췄지만, 저축은행들은 인하를 주저하고 있으며 심지어 높인 곳도 있다.

특히 연말 연초에 예금 만기가 몰려 있는 저축은행들은 돈이 빠져나갈 것이 두려워 8%대 예금금리를 쉽게 낮추지 못하고 있다.

1년 만기 정기예금은 업계 1위인 솔로몬저축은행이 8.4%를 지급하고 있으며 대형 저축은행은 대부분 8%대 중반의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제일저축은행은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가 8.7%에 달하며 경기저축은행도 22일부터 300억 원 규모로 1년 만기 정기예금에 기존 금리보다 0.2%포인트 높은 8.7% 금리를 적용할 계획이다.

수신 기능이 없는 여신전문금융회사들도 회사채 시장의 경색으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부금융사의 회사채 발행규모는 올해 9월 7천398억 원에서 10월 1천450억 원, 11월 1천150억 원으로 급감했고 이달 들어 19일까지도 1천50억 원으로 바닥 수준을 지속하고 잇다.

카드채 발행규모는 9월 8천600억 원에서 10월 6천400억 원, 11월 2천430억 원으로 급감했다가 이달 들어 19일까지는 4천80억 원으로 늘었다.

그러나 평소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있고 전체 발행액의 절반 이상을 삼성카드(2천150억 원)가 차지하고 있어 다른 카드사들의 발행 실적은 부진한 상태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은행들이 신용위험 때문에 자금을 적극적으로 돌리지 않고 있다"며 "유동성 공급으로 단기시장에서 자금 사정이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금경색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j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