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부터 벤처정신 다져
아버지가 일군 회사 망쳤다는 말 들을까봐 3년간 새벽출근 청소까지


인천 남동공단에서 언더웨어 부자재를 납품하는 'U패션'의 이모 실장(33).창업주의 장남인 이 실장은 2003년 입사한 뒤 남모를 고초를 겪었다. 경영 수업을 위해 영업에 나섰지만 기존 거래처로부터 "추가 납품은 곤란하다"며 퇴짜 맞기 일쑤였던 것.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했던 그는 최근에야 '진실'을 알게 됐다. 한 거래처에서 당시 회사의 실세 임원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농간을 부렸다는 것을 귀띔해 줬기 때문이다.

가업 승계를 앞둔 창업주 못지않게 2세들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모진 결심을 하고 회사에 들어왔지만,밖으로는 상속세 문제에 시달리고 안에서는 능력과 무관하게 '아버지 잘 만난 2세'라는 세간의 곱지 않은 인식으로 숱한 견제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외롭고 힘든 中企 2세들

이 실장처럼 대부분의 2세들은 내부 구성원들로부터 질시를 받게 마련이다. 중소기업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가업 승계의 주된 장애 요인으로 '조직 갈등'을 꼽는 응답이 21.9%나 됐다. 특히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창업 공신들과의 갈등이 빈번하다. 일반 직원들 역시 2세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후계자들을 부담스럽게 여기기는 마찬가지.포장용 박스 절단용 칼을 생산하는 K사의 Y실장은 "회사에 입사한 첫 해에는 본인들의 밥그릇이 위협받을까 봐 그런지 아무도 노하우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며 "대화할 때도 끼워 주지 않고 나만 모르게 임직원들끼리 일을 진행해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경영관 차이 등으로 부친과의 갈등을 호소하는 2세들도 적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에서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한 2세들의 몸부림도 눈물겹다. 업무 파악을 위해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밤 11~12시까지 근무하는 것은 기본.열악한 제조업체인 만큼 영업과 생산 등 2~3개 업무를 겹치기로 맡는 일도 다반사다. 직원들의 고충을 들어 주거나 수시로 간식을 사는 등 '소통'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다. Y실장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업무 강도나 내부 견제 등 안팎으로 겪는 고충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라며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치 '재벌 2세'나 '황태자'로 보는 시선을 견디기 어렵다"고 밝혔다.

◆'모자 갈아 쓰기'도 유행

상속세의 짐도 2세들로서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인천의 유리 가공업체 K사는 지분의 99% 이상이 창업주에게 집중돼 있어 2세가 현재 상태에서 승계하려면 무려 28억원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 2세인 P전무는 "아버지가 고생해서 일군 회사를 망쳤다는 말을 들을까 봐 3년 동안 새벽 6시에 출근해 사무실과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했다"며 "상속세 생각만 하면 막막하지만 가업을 잇고 싶은 마음으로 입사했으니 결코 문 닫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도한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부채를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부친이 창업한 회사의 자산을 축소하고 2세가 동일한 업종의 회사를 설립해 키우는 형태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른바 '모자 갈아 쓰기'라고 불리는 우회 승계 방식이다. 이를 두고 2세들은 어쩔 수 없는 '정당 방어'라고 항변한다. 울산의 조선 기자재업체인 C사는 2004년 2세인 L실장이 신규 법인을 설립한 이후 당초 30억원 선이었던 연매출 규모를 해마다 축소해 지금은 4억원까지 떨어뜨렸다. C사는 2~3년 이후 남은 거래선을 모두 신설 법인에 몰아 준 뒤 폐업하기로 결정된 상태다. L실장은 "세무사 자문 결과 상속세를 내고 나면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며 "현실적으로 이런 방식 외에는 승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우회 승계는 엄밀히 말해 가업 승계와는 차이가 있다. 사명과 역사성이 유지되지 않는 것은 물론 기술과 노하우 등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기존 거래처가 끊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전통이 온전히 이어지지 못하는 셈이다. 경남지역 중소 설비업체의 2세인 K씨는 "창업 회사에는 취득세 감면 등의 인센티브가 있지만 가업 승계 기업에는 가혹한 세금을 매기고 있어 불가피하게 우회 승계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편법을 조장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고 지적했다.

◆동병상련…2세 모임 봇물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실에서는 적어도 10년 이상 2세들을 경영 수업에 참여시켜 상속 과정의 충격을 분산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2세들이 장기간 경영 수업을 받을 경우 회사 전통과 조직원들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가업승계 컨설팅을 해 주는 성도회계법인의 박근석 회계사는 "진정한 가업 승계는 단순히 회사를 대물림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회사의 전통과 기업가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며 "이를 위해 장기간 경영 수업을 통해 창업 세대와 후계 세대 간의 패러다임을 조화롭게 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2세들도 최근 별도의 모임을 구성해 가업 승계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주도로 구성되는 2세 모임인 '차세대 기업인 클럽'이 대표적이다. 14개 클럽으로 구성된 이 모임에는 현재 429명의 2세들이 가입해 있다. 특히 올해에만 서울 동남부 '차세대 A.C.E',안산 '뉴리더 클럽',울산 'NECUS' 등 9개 클럽이 구성됐을 정도로 2세들의 참여 의욕이 높은 상태다. 일부 모임에서는 골프 얘기를 금기시할 정도로 생산적인 경영정보 교류에 치중하고 있다. 기업은행에서 주관하는 'EverBiz' 클럽에도 현재 420명의 2·3세들이 가입해 있다.

이들은 이 모임들을 통해 경영 정보를 교류하고 리더십,세법,법률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울산 NECUS 클럽의 이치윤 덕양에너젠 대표는 "평소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2세들이 이 모임을 통해 동병상련의 고민들을 나누고 세무 정보나 경영 애로를 공유하고 있다"며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창업정신 못지않은 벤처정신으로 무장해 훌륭한 회사를 만들고 싶은 의지를 한층 더 강하게 다지게 된다"고 전했다.

이정선/임기훈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