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 선고와 함께 사회봉사 명령을 내린 것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정 회장이 한 사회공헌 약속 이행을 강제하는 의미의 '사회봉사 명령'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법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제3의 길'"이라고 밝혀 향후 법정에 서는 대기업 총수들에게 사회봉사 명령이 확대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0부 이재홍 수석부장판사는 쟁점이 됐던 현대우주항공과 현대강관 유상증자 과정의 배임에 대해서도 혐의를 인정하는 등 정 회장의 유죄를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이 수석부장판사는 "국가경제를 위기에 처하게 할지도 모를 도박을 하기는 꺼려졌다"고 말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재판부의 고민이 깊었음을 드러냈다.

재판부는 특히 분식회계로 최고경영자에게 20년 이상의 중형이 선고된 미국 에너지기업 엔론사태와 달리 현대차는 △정 회장이 경영을 진두지휘해왔고 △엔론에 비해 현대차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더 크다는 점을 들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여론을 수렴해 보니 언론인 등 사회 상층에서는 실형 선고 의견이 많았지만 (음식점 종업원·택시기사 등) 서민들은 집행유예를 원하는 패러독스(역설)가 나타났다"며 "서민일수록 먹고 사는 데 더 관심을 둔 게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특히 투명사회로 가는 미국에 비해 한국은 아직 법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는 점을 들어 사회봉사 명령이 간극을 메우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가수를 1년간 감옥에 넣는 것보다는 1년간 무료공연을 하도록 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비유를 들며 사회봉사 명령의 의미를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와 함께 정 회장이 사회공헌 약속을 한 부분을 사회봉사 명령에 포함시켜 법적 강제력을 부과했다.

사회봉사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집행유예가 취소되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1년에 1200억원씩 2013년까지 8400억원가량의 사재를 출연해 서민을 위한 복합문화센터 등을 건립하고 환경 보존에 사용하는 등 사회공헌계획을 밝힌 바 있다.

재판부는 "집행유예 기간에는 약속을 이행하고 나머지 기간은 피고인의 선의에 맡기겠다"고 밝혀 2011년까지 5년간 6000억원의 사재 출연에 대해 '강제력'을 부과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또 "여수박람회 유치 명예위원장으로서 유치에 진력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경제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목될만하나 일각에서는 회사 자산의 사적 유용과 편법 경영권 승계 등 일부 기업들의 잘못된 경영행태를 바로잡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법원이 가급적 1심 형량을 유지한다는 방침을 밝혔음에도 별다른 사정 변경 없이 항소심 형량을 낮췄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정태웅/박민제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