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들은 정년을 65세까지 연장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지금의 고령화 추세대로라면 정년을 연장할 수밖에 없죠.따라서 연공서열 중심의 기존 임금구조로는 절대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없습니다."

LG전자의 김영기 인사담당 부사장은 지난 2월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임금피크제와 같은 고령자 고용 확대 방안이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경험이 많고 숙련된 고령 근로자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인건비 부담을 경감하는 임금피크제가 이 같은 상황의 현실적 대안이라고 김 부사장은 강조했다.

LG전자뿐 아니라 산업계에 임금피크제 도입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기업들의 이런 상황 인식에서다.




◆성과형 보상체계 전환의 중간단계

기업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보상체계는 하는 일(직무)이나 성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형태다.

철저하게 생산성에 근거해 임금을 책정해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보상체계를 당장 도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게 업계의 진단이다.

직무나 성과에 대한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만들고,이 시스템이 근로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김동욱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경제조사팀장은 "따라서 우선은 다소나마 생산성에 연동해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임금피크제를 통해 '유연한 보상체계'를 도입하려는 게 최근 기업들의 움직임"이라며 "결국 임금피크제는 직무·성과형 보상체계로 가는 중간 과정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임금피크제를 시작으로 연공서열 중심으로 이뤄진 보상체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청년 취업난에 영향은 미미

임금피크제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싼 인건비로 숙련된 고령 근로자를 활용하고,근로자 입장에서는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윈윈 게임'이다.

하지만 고령자 고용이 늘어나면서 심각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젊은 인력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오랜 경험을 가진 고령 근로자가 할 수 있는 일과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게 기업들의 입장이다.

특히 젊은 층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해 고령 인력 활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기업들은 주장한다.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서울소재 제조업체 220개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기업의 50%가 인력 고령화의 원인으로 '쉽고 편한 일을 좋아하는 세태로 인해 젊은 층의 지원이 적어서'라고 답했다.

재계 관계자는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미국은 그나마 이민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줄어드는 노동력을 외국인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이민에 폐쇄적인 한국과 일본은 고령자 고용 확대를 통해 노동력 부족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동계 반대가 최대 걸림돌

임금피크제가 고령화 사회의 현실적 대안이라는 주장이 나온 건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몇 공기업과 금융회사를 제외한 주요 제조업체들이 도입을 미뤄온 건 노동계의 반대 때문이었다.

특히 이 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민주노총 산하 사업장 중에서는 증권선물거래소만이 올해 초 유일하게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을 정도다.

이는 '임금피크제는 사실상의 구조조정'이라는 노동계의 인식 때문이었다.

특히 그동안 기업들은 LG전자와 같은 '정년연장형'이 아닌 '정년보장형(정년을 늘리지 않고 일정 연령 이상의 임금을 삭감해 조기퇴직을 방지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를 주로 도입해 노동계의 이 같은 인식을 뒷받침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제조업체들은 모두 정년연장형을 택해 '고령자 고용을 확대한다'는 제도의 취지를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기업들은 말한다.

재계 관계자는 "2003년 제조업 최초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대한전선의 경우 처음에는 임금보장형을 택해 인건비를 줄인다는 성격이 짙었지만,2년 후인 2005년에는 정년을 2년 연장해 노사 간의 신뢰를 쌓았다"며 "회사 측의 방침에 대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노조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