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5개월간의 해외체류 끝에 귀국한 직후인 지난 2월7일 8천억원의 사회헌납 등의 내용이 담긴 삼성의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 발표된 지 반년이 흘렀다.

'2.7 선언'의 핵심인 8천억원 헌납은 삼성쪽에서는 절차가 완료됐지만 정부에서 이를 맡아야 할 교육부가 장관 교체 파동에 휘말리면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2.7 선언'에 포함된 내용들은 착실히 이행돼 삼성에 대한 국민적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남은 과제들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 8천억원 장학재단은 '휴업중'

삼성은 지난 5월22일 이건희 회장과 자녀들의 현금, 주식 등을 추가 출연해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의 자산규모를 4천500억원에서 8천억원으로 확대한 뒤 소유와 운영권 일체를 교육부에 넘겼다.

삼성측에서 위촉한 이사진도 전원 사퇴해 삼성은 이 재단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고 재단이 그동안 담당해왔던 장학생 선발사업은 앞으로는 계열사들이 매년 자금을 갹출해 이어가기로 했다.

삼성의 8천억원 헌납은 이제 교육부가 새 이사진을 구성하고 이들이 사업목적이나 앞으로의 운영방안을 결정해 정관을 변경하는 절차만을 남겨두게 됐다.

그러나 교육부 수장인 교육부총리의 인선이 큰 정치쟁점이 되면서 삼성이건희장학재단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새 교육부총리 인선이 마무리돼 이사진 재편작업이 본격화한다고 해도 재단의 목적과 지원대상을 둘러싼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정부가 어떻게 적절히 수렴할 수 있을 지도 쉽지 않은 문제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이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쓰여지면 좋겠지만 이제는 우리 손을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어떤 의견도 내놓을 수 없다"고 밝혔다.

◆ 대부분은 지켰다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 구성과 자원봉사 확대, 구조조정본부와 법무실 축소재편, 정부 상대 소송 취하 등은 이미 완료됐거나 차질없이 실천되고 있다.

삼지모는 김형기 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 방용석 전 노동부 장관, 신인령 이화여대 총장,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이정자 녹색미래 대표, 최열 환경재단 대표,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 사장,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8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한차례 상견례를 겸한 회의까지 마쳤다.

이들이 진정으로 삼성에 비판적인 인사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6월 열린 첫 회의에서는 삼성의 무노조 방침 등에 대한 '따끔한' 지적과 고언이 쏟아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13일에는 전국 103개소의 자원봉사센터 개소와 함께 전 임직원의 자원봉사 활동 참여가 선언됐다.

삼성은 지역별, 계열사별로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고 올여름 중부지역을 강타한 수재 피해 현장에서도 삼성의 자원봉사자들은 큰 활약을 보였다.

이에 앞서 그룹과 계열사 소속 변호사들로 구성된 '삼성법률봉사단'은 지금까지 서민을 위해 2천여 차례의 무료 법률상담과 30여차례의 무료 변론활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밖에 구조조정본부의 소재편과 그룹 법무실의 사장단협의회 이관 등도 이미 완료됐고 이에 따라 계열사별 독립경영 체제가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고 그룹측은 설명했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관련 증여세 부과소송과 공정거래법 일부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 등 대정부 소송 취하는 '2.7 선언' 직후 실행에 옮겨졌다.

◆무엇이 남았나

'2.7 선언' 발표 당시 별도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삼성이 밝혔던 중소기업지원 방안에 관해서는 아직도 구체적인 윤곽이 나오지 않고 있다.

삼성측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에 대한 경영기법 전수, 오너 2세들을 위한 위탁교육, 현금결제 확대 등 방안을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별도의 대책으로 발표할만한 것에 관해서는 아이디어가 마땅찮아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고용과 투자 확대에 관해서도 획기적인 대책이 나오지는 않고 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뉴딜' 제안으로 이 부분은 재계 전반의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삼성은 대졸 신입사원을 다소 늘린다는 방침이 있을 뿐 정부.여당이나 사회의 기대에 부응할만한 투자 및 고용 확대 방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가망성이 없는 사업분야에 투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정치권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자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근본적인 과제

'2.7 선언'과 이의 실천으로 삼성을 둘러싼 난제들이 모두 극복된 것은 아니다.

당장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배정 의혹을 둘러싼 검찰의 수사와 재판이 계속되고 있고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유구조와 경영권 승계에 관해서는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이 '2.7 선언'을 통해 밝힌 세부적인 대책의 이행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대의 탓'으로 돌렸던 과거의 적폐를 극복하고 책임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진정성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의 근본적 문제로 불리는 지배구조나 경영권 승계 등을 둘러싸고 사회적 비판이 있는 부분에 대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더라도 고칠 것은 고치고 국민여론의 양해를 구할 것은 구하는 진솔한 태도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