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나올 얘기다. 전직 고위 관료 A씨가 얼마전 일선 공무원에게 당한 일이다. A씨의 집은 서울이라지만 뜰에 우물이 하나 있다. 가뭄 때 화단에 물을 주는 데 사용할 뿐 평소엔 거의 쓰지 않던 우물이다. 하루는 구청 공무원이 그를 찾아왔다. A씨 집에서 우물물을 퍼내는 바람에 이웃의 지반이 침하되고 있다는 진정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진정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는 공무원이 반가워 서둘러 문을 열어줬다. 그런데 웬걸.뜰의 우물은 확인하는둥 마는둥 하던 이 공무원,지하수 사용료가 밀렸다며 느닷없이 수백만원을 부과하더란 것이다. 지하수를 사용하면 하수도료를 내야 한다는 서울시 조례가 10여년 전 만들어졌다며 사용량을 모르니 최대한 계산했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그런 사실을 통보받은 적이 없었다는 A씨의 항변은 "당시 관보를 찾아보라"는 무뚝뚝한 답에 묻히고 말았다. 분통이 터진 건 그 다음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 공무원,A씨에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꼭 다 내라는 건 아니지요. 제가 잘 알아서 처리할 수도 있구요…"라며 귓속말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평소 "공무원의 비리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 사라졌다"고 자신있게 말해온 그에게는 보통 큰 충격이 아니었나 보다. 아무리 전직이라지만 자신처럼 얼굴이 많이 팔린 공직자에게까지 이런 일이 벌어지니 더 할 말이 뭐가 있겠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민단체는 참여정부의 3년을 평가하면서 25개 평가항목 가운데 사회적 차별 해소,지방 분권과 함께 부정부패 척결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참여정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돈 안드는 정치 문화를 조성한 '공로'만큼은 인정하니 말이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공은 그것으로 끝이다. 정작 국민들과 맞닥뜨리고 있는 공무원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업이나 국민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일선 공무원들의 부패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다. 몇 년 전 영어학원을 개설한 B씨는 원어민 강사의 취업비자를 갱신하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해당관청에 갈 때마다 요구하는 서류가 달라졌고,아무리 서류가 완벽해도 이유 없이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비자가 만료된 몇몇 강사에게는 고국에 돌아가 비자를 받아오도록 왕복 비행기표까지 사줘야 했다. 그는 동업계 사람들의 코치를 받아 서류 뒤에 '급행료'를 첨부하는 노하우를 터득하고서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닉 라일리 GM대우 사장은 며칠 전 한 세미나에서 명절 때 이해관계자들에게 돈 봉투를 돌리는 한국의 관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위 관리가 '선물'을 주지 않으면 좋지 않을 수 있다고 뇌물을 요구해왔지만 거절했다는 사례도 소개했다. 하지만 공무원이 '선물'을 요구한 곳이 어디 GM대우 한 회사뿐이랴.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의 부패 정도가 과거에 비해 더 악화됐다는 보고서를 냈다. 참여정부 들어 부패의 원인이 되는 규제가 더 늘어났고,그 결과 부패가 매년 성장률을 1.4%포인트씩이나 까먹고 있다는 게 보고서의 골자다. 윗물이 맑아졌으니 아랫물도 자연히 맑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참여정부의 착각에 기업과 국민들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김정호 경제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