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7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한다. 이라크 침략을 둘러싸고 냉각됐던 두 사람의 관계는 지난 2월 부시 대통령의 방독 이후 정상화됐다는 것이 양측 정부의 공식 입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 앙금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더욱이 지난 4개월 사이에 양측의 입지에 큰 영향을 줄, 특히 슈뢰더 정부로서는 불리한 상황 변화가 있었다. 슈뢰더 총리 입장에선 사회민주당의 40년 아성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선거에서 참패해 연방하원 조기총선을 승부수로 띄웠으나 여론 조사 결과 야당의 압승이 예상되면서 국내외적으로 급격하게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 뼈아프다. 이와 관련해 페터 슈트루크 국방장관이 지난 주로 예정됐던 미국 방문계획을 취소한 것은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면담시간을 45분밖에 할애하지 않는 등 백악관과 국방부 측의 냉대 때문이라고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보도한 바 있다. 슈트루크 장관에 대한 홀대에는 슈뢰더 총리 내각이 이미 레임덕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미국 정부의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는 것이 슈피겔의 분석이다. 존스 홉킨스대학의 독일 전문가 스티븐 자보 교수는 "슈뢰더는 이미 레임덕(절름거리는 오리)이 아니라 데드덕(죽은 오리)"이라고 까지 평가했다. 부시와 함께 이라크 침략에 적극 가담한 영국과 호주 총리가 재선에 성공한 반면 반대의 선봉이었던 슈뢰더 총리의 3선 실패가 확실시되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유럽헌법 부결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9월 조기총선에서 보수 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이 집권해 상대적으로 친미 성향을 보여온 앙겔라 메르켈 기민련 당수가 총리에 오를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이 슈뢰더 총리와의 회담에 무게를 둘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슈뢰더 총리의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것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미국의 반대다. 미국은 독일이 일본, 브라질, 인도 등 이른바 G4와 공동 제출한 안보리 개혁안을 거부하고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 만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에게 전화해 미국의 입장은 독일 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며 개혁 방안 전반에 관한 것이라며 다독거리긴 했다. 하지만 백악관측은 정상회담에 관한 사전 브리핑에서 "유엔 개혀에 관한 미국의 입장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 정부 관계자도 브리핑에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미국이 독일의 뺨을 때리고 있다"는 것이 독일 측의 생각이다. 이런 가운데 이번 독-미 정상회담에선 ▲유엔 개혁 ▲국제 대테러전 공조 강화 ▲중동 평화 정착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에 대한 지원 확대 ▲ 기후변화와 투기 자본, 고유가 대책 ▲유럽연합의 정치적 위기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 기후변화 대책과 투기자본 규제 강화에 대해 독일은 적극적이나 미국 정부, 특히 부시 행정부는 미온적이다. 아프리카 지원 확대와 관련해서는 영국과 미국이 각각 옛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중동ㆍ아프리카 장악력 강화 차원에서 접근하는 반면 독일로서는 실익이 별로 없다는 판단이다. 다만 독일이 미국을 제외하고는 분쟁지역에 가장 많이 파병, 미국의 재정적, 군사적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는 점 때문에 부시로서도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일정하게 협조를 구하는 자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두 정상은 회담 뒤 공동기자 회견에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양국의 우호 관계 확인과 협력 강화 다짐을 강조할 것이지만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말하자면 슈뢰더 총리의 작별인사성 회담이 될 전망이다. (베를린=연합뉴스) 최병국 특파원 choib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