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이후 한국의 정치지형이 크게 변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세대교체가 급격히 이뤄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정치의 이념적 좌표도 재정립되고 있다. 개혁 지향의 열린우리당의 다수당화, 한나라당의 중도보수화, 민주노동당의 제도권 정치 진입, 그리고 보수 지향의 자민련 와해 등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정치지형 변화를 보는 외부의 시각은 곱지만은 않다.대부분의 해외 투자분석기관들이 표면적으로는 4·15 총선 결과를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이자 승리로 평가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커다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이들의 우려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그 하나는 경제에 대한 우려다.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들이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하면서 반기업적 이념과 정강 정책을 표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유화적 대북정책 추구를 통해 한·미동맹의 균열을 야기하고,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한국의 정치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개혁 정당=반기업'이라는 등식에 문제가 있다. 한국의 헌법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통치이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적 규정과 선거라는 절차적 통제 기제가 존재하는 한 어떠한 개혁 정당도 맹목적인 '반기업적' 정강 정책을 채택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기업은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인의 목표는 재선에 있고 정당의 목표는 정권 재창출에 있다. 이를 위해선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성장과 고용이 담보돼야 한다. 성장과 고용창출의 주역은 기업이다. 따라서 그 어떤 정당도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반기업적 정책을 펴기는 어렵다. 이는 정치적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들도 이러한 한국정치의 구조적 제약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 간과할 경우, 정권 재창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합리적 정책을 통해 성장과 분배를 조율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며 경쟁정책의 강화를 통해 경제력 집중과 도덕적 해이를 차단하려는 노력, 그 자체를 반기업적인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오히려 반기업이 아니라 친기업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안보와 대북정책만 해도 그렇다. 한·미공조와 남북공조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인위적으로 설정하고, 개혁세력을 민족공조파 또는 자주파로 단선적으로 분류해선 안될 일이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민족공조나 자주가 아니라 '반전,반핵'에 있다. 이들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한·미동맹의 유용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반대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한·미동맹의 운용에 있어서 미국의 일방적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대화와 협상의 노력 없는 대북 적대시 정책이다. 미국의 이러한 태도가 한반도의 군사긴장과 전쟁의 개연성을 고조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개혁세력을 자주의 이름으로 북한을 맹목적으로 감싸고 도는 감상적 민족주의자들로 인식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들이 북한에 대한 포용과 평화 공존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의 핵 보유나 재래식 군사도발에 대해선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자주와 동맹, 그 어느 하나 만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점을 감안할 때 개혁세력의 이러한 노력은 지극히 바람직하다 하겠다. 따라서 새로운 개혁세력의 등장을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성장과 안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열린우리당은 당의 정체성을 '실용 정당'에서 찾고 있다. 경직된 이념에 현실을 재단하는 '프로쿠루테스의 침대'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고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국정에 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불필요한 우려보다는 희망의 자세로 새로운 개혁세력의 국정 운영을 기대해 보자. cimoon@yonsei.ac.kr